뉴제너레이션 워십 [아름다워 You’re Beautiful]
예수님은 당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죽음을 향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요 12 : 23절)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죽음이 영광이라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 제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까지 살았던 사도 요한은, ‘밧모’라는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성령에 이끌려 천국에 들림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때, 요한은 [영원한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을 뵙고는, 그 발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 1 : 17절)
이 땅을 거니실 때의 예수님도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심령을 찔러 쪼개는 그분의 가르침과 질병도 귀신도 풍랑도 심지어 죽음도 굴복시키는 능력의 예수님은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이 땅에 영체로 머무실 때의 예수님도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뵌 예수님은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와 영광과 아름다움의 극치인 예수님 ; 완전한 영화에 이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인자가 영광을 얻게 되리라” 말씀하신 그 영광을 입으셨던 것이고,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요한은 영광스럽고,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적합하게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보좌 위에 앉아 계셨고, 예수님의 모습은 [벽옥과 홍보석] 같았고 (계 4 : 2 - 3절), 예수님의 목소리는 [많은 물소리]와 같았으며 (계 1 : 15절), 해 같은 거룩한 광채가 그분에게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뵌 예수님은, [완벽 그 자체]였고, “Jesus, You are beautiful”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체셨습니다.
그로부터, 2천 여년이 지났지만, 우리 또한 예수님이 “아름다우신 분”임을 압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는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때때로 마주하게 됩니다.
세상의 사랑이 조건적이고 유한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낙담할 때,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사랑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영혼이 끌립니다.
인간은 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에 절망할 때,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변함없으신 예수님의 성품 앞에 사랑이 피어납니다.
죄악과 탐욕으로 얼룩진 나 자신에게 환멸이 느껴질 때, 한점 티조차 발견할 수 없는 그분의 거룩하심이 너무도 고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사람의 배신에 몸서리칠 때, 생명까지 버리며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희생은 너무도 아름답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죄 많고, 허물 많고, 실수도 많고, 신실하지도 못한 “게달의 장막”같은 나를 “솔로몬의 휘장”으로, “바로의 병거의 준마”로 바라봐 주시는 예수님의 눈은 너무도 아름다우십니다. (아 1 : 5, 9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눈과 입과 손과 발과 마음이 아름다우신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토록 아름다우시고 완벽한 예수님의 눈에, 우리 또한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신부”로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아가 5: 2)
예수님은, 믿는 우리들을 “나의 완전한 자”라 부르십니다.
그분은 나를 “질투하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그 앞에 있는 십자가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한 가지 열망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신부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입니다!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의 웨딩벨” 속에, 거룩한 면사포를 쓴 당신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을, 예수님은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신랑의 사랑과 신부의 사랑이 부딛히는 노래가 [You’re beautiful], 이 노래이기를 소망하며, 이 노래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이 노래를 듣고, 부르실 때 가장 아름다운 신랑과의 입맞춤을 경험하는 “예수님의 신부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_ 사랑을 전하며 예수님의 신부 천관웅 드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