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이수만과 '사월과오월'이라는 통기타 듀엣으로 출발하여 "화"를 히트시키면서 여학생 팬들을 사로잡았던 백순진은 이미 고교시절 '엔젤스'라는 록그룹을 결성했으며 미8군에서도 활동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항공대의 그룹사운드 '렌웨이' 팀에 초청되어 기타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태풍으로 멤버를 교체하고 1972년 오아시스에서 첫 음반을 낸 이후 1973년의 2집에서는 통기타음악의 범주를 벗어나는 상당히 실험적인 음반을 발표한다. 그리고는 '들개들'이라는 4인조 록그룹을 결성하여 통기타듀엣 '사월과오월'의 활동과 병행하는 음악적 의욕을 보인다. 이들은 1974년 7월 연대대강당에서 자선공연형식으로 들개들의 리사이틀을 열어 존재를 과시한다. 이렇게 자신의 사운드를 계속 발전시키고 싶었던 백순진은 이장희의 음반 이후 새로운 경향과 사운드를 보이고 있던 오리엔트 프로덕션으로 이적한다.
바로 여기서 백순진은 그의 모든 음악적 내공을 분출하는 명반인 세 번째 음반을 탄생시키게 된다. 전체적인 사운드는 가벼운 곡과 무거운 곡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으며 이전의 음반에 비해 사운드의 공간감은 훨씬 깊어진다. "등불"은 처음에는 발라드 풍이지만 후반부에서는 분위기를 반전하여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면서 기존의 통기타음악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백순진은 "팀파니도 들어가면서 더 무겁게 갔어야 했는데 아쉽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옛사랑"은 이 음반의 백미이다. 백순진이 만든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연상케 하는 전주는 강근식의 기타연주에 의해 불을 뿜는다. 후반부의 선율과 코드의 내성이 어우러지는 대위적 진행은 백순진의 작품이 상당한 수준의 미학적 성과를 획득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그가 록음악의 어법을 도입한 것은 주류 음악권의 미학을 파괴함으로써 억압된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음악적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적 고려임을 짐작하게 한다. 어떻게 1970년대 중반에 이런 사운드가 나왔는지는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by 대중음악평론가 김형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