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다녔던 적이 있다. 누군가는 '모든 것'이라고 대답했고, 누군가는 '수학'이라고 대답했으며, 누군가는 질문을 피했고 누군가는 그런 걸 왜 물어 보냐고 반문했다. 때때로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 같은 대답을 들으며 놀라기도 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신기하게 어떤 대답을 들어도 그것을 얄밉게 비껴가는 예술 작품들이 떠올랐다. 가령 '모든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에는 '그렇다면 코로나도 예술인가?' 따위의 질문이 생각났고, 그러다 백 번 쯤 물어보았을 때에 그 질문은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어느샌가 그 질문은 '너랑 5분 정도 쓸데없지만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친해지고 싶어' 정도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당장 서울 하늘 아래에는 수천개의 콘서트홀, 미술관, 클럽, 극장이 있지만 내가 가장 자주 경험하는 가볍고도 기술집약적인 문화 활동은 역시 숏폼 비디오 시청이다. 수천년 전 극장을 채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던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이제 '탕후루냐 당뇨냐 그것이 문제로다'만큼 심금을 울릴 수는 없고, 이제 5초 안에 이목을 사로잡지 못하는 거의 모든 비디오/오디오 컨텐츠들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두시간 분량의 영화, 5분 남짓의 노래들이 30초짜리 '하이라이트'로 정리되는 요즘, 남메아리밴드의 <기 울 인 체>는 철저히 느린 호흡의 미괄식 구성을 취한다. 예술이 무엇이냐고? 5초 안에 설명 못해 일단 앉아서 들어봐봐.
문득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면 아침 햇살이 눈부신 나의 고향 남쪽나라. 한 눈에 숨이 막히는 화려한 절경은 아니건만 그토록 도달하고 싶었던 노스탤지어임을, 동시에 영원히 도착할 수 없는 유토피아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현실과 상상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은 종종 속절없이 나타나 영원할 것 같은 감동을 주며 불시에 소멸한다. 그렇게 소리로 존재하기에 끝없이 유한한 세상을 마주하고 나면 절로 고개가 삐딱해진다. 기울인 체 견디는 우리는, 주변의 불안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시에 그 예민함에 스스로 피로해지기도 한다. 어쩔 도리가 있나. 그저 주어진 숨이 다할 때까지 북치고 장구치며 풀어제낄 수 밖에.
'머무는 바다'의 기타리스트는 급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당신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 앞에서 들이는 뜸의 달콤함이란. 어쩌면 인류의 역사 보다도 무한할 음악의 여정에서 잠시 머무는 공백. 5초 안에 승부를 봐야 하는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장단으로 고유히 뛰놀다가도 같은 멜로디 안에 머물며 함께 아름다워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 더 이상 무슨 전진이 필요할까? 부처님 말씀하시길 모든 시공간은 선형이 아닌 원형이다. 그 속에서 드럼, 건반, 베이스, 그리고 기타는 제각각의 색깔을 뽐내며 둥글게 꼬리물고 어우러진다.
마침내 앨범은 소중히 숨겨온 하이라이트를 내민다. 여기까지 들어준 당신, 고맙습니다. 긴 호흡의 이야기가 당신의 인내에 보답하는 방식은 사뭇 순수하기 그지없다. 남메아리 밴드에게 처음 주어진 야외 무대에서 기타리스트 신현빈은, 그 자리에 앉아 우리의 음악을 기다려줄 관객 여러분들에게 손을 내밀어 라스트 댄스를 제안하기로 한다. 황금색 태양이 하루의 끝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일 때의 아득한 안도감. 이 느리고 우아한 세상에 완전히 녹아든 당신은 도리어 이 노래가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해가 지면 어둠 속에서 초 하나가 켜진다. 누구나 각자의 초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켜는 것 역시 각자의 몫이다. 지금 막 켜진 이 촛불은 남메아리의 Jan Hammer와 Jeff Beck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피어올라 드럼으로 옮겨붙어 활활 타오른다. 사자후같은 날숨이 가져다주는 긴장에 흠뻑 몸을 적시다보면 어느 새 시공간은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네 명의 뮤지션 앞으로 이동한다. 어차피 사라질 소리를 위해, 어차피 지나갈 순간을 위해, 어차피 아무것도 아닐 모든 것들을 위해 퉁기는 현, 누르는 건반, 울리는 북, 진동하는 고막.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하질 않던가.
‘한 명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 줬으니 그걸로 됐다.’ 추천사를 쓰기 위해 가졌던 사전 인터뷰를 마치며 남메아리는 이렇게 말했다. 후회없이 쏟아부은 예술가의 개운하고 겸손한 심중소회는 도리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안달나게 만들기도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줬으면,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갔으면 하는 나의 조급한 바람은 새삼 '다섯 걸음'속 소박한 하모니 앞에 차분히 부끄러워진다. 편법 없이, 요령 없이 묵직하고 길게 풀어낸 이 이야기가 지닌 멋과 향은 가볍게 끌어안을 수 없기에 더욱 또렷하게 울린다.
글 슬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