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自覺): 키리에의 경우 - 코토바 [Humanoid operational]
SF 작품을 좋아한다. 영화, 드라마, 책. 매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한글로 풀어 ‘공상과학’이라 부르는 말의 어감도 좋다. 공상과 과학이라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만나 현실이 되는 비현실적 감각이 좋다. 눈 앞에 펼쳐진 가상의 세계가 담보하는 한계 없는 가능성이 좋다. 매스록을 좋아한다. 직접 연주를 해보지 않았으니 변박이니 엇박이니 얼마나 많은 음표와 리듬이 필요한지는 알 리 없다. 다만 그 음악이 가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느낌이 좋다. 빗겨나가는 리듬에 맞춰 흔들다 보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이 좋다. 무아지경 속 피어나는 환상이 좋다. SF와 매스록, 접점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장르가 하나의 점으로 수렴한다. 예측할 수 없는 멜로디와 리듬에 실려 떠나는 무한 상상의 세계. 코토바의 새 앨범 [Humanoid operational]은 바로 그 점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간다.
코토바가 처음 신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런 앨범을 발표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스록 계의 기린아, 멜로디를 잘 쓰는 포스트록 계의 신예 정도로 언급되던 이들이 서서히 이야기꾼으로 변하고 있다는 조짐은 2021년 발표한 EP [세상은 곧 끝나니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매스록 밴드로서의 정교함이나 날씨, 기쁨과 슬픔 등 일상적인 테마를 음악으로 그려내려 노력한 초창기를 지나, 이들의 창작을 이끈 건 세계의 종말 앞에서 느끼는 존재가치나 나무 아래 죽음을 찾아 솟아오른 우물 안의 서울처럼 서사적이고 시각적인 끌림이었다
앨범 [Humanoid operational]의 주인공 키리에는 그런 변화의 흐름 속 태어났다. 키리에를 주연으로 한 SF 작품의 OST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앨범은 첫 곡 ‘Intro session: Humanoid operational’에서 마지막 곡 ‘오늘도 세상은 아름다워’까지 키리에의 시선과 사고를 따라 진행되는 한 편의 이야기다. (CD에는 ‘서쪽의 바람’이 보너스로 수록되어 있다) 키리에는 과거에 존재했던 인간종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 지금에 파견된 인간형 로봇이다. 인간은 동족 분쟁과 인공지능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소멸한 지 오래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SF 작품이 대개 그렇듯, 처음엔 단순히 일로서 인간을 관찰하기 시작한 키리에는 결국 인간과 나누는 교류 속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변화한다. 도시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더운 숨, 점차 차오르는 여름의 열기, 여름에 날리는 눈을 보며 느끼는 신비로운 아득함,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아픔이라는 감각. 그 혼란하고 혼곤한 여정을 밴드 코토바의 무르익은 멜로디와 리듬이 바짝 따라붙는다. 망설임 없이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인트로에서 코토바의 음악을 이끄는 특유의 벅차오름과 서정이 각각 애정과 고독으로 표출된 ‘coii’와 ‘유리(遊離)’, 리듬과 내레이션 모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도록 극적으로 전개되는 ‘키리에의 숲’을 지나 마지막과 새로운 시작이 교차하는 익숙한 풍경을 꿈꾸게 하는 ‘오늘도 세상은 아름다워’까지. 앨범은 이야기와 음악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덩어리로 다가온다.
이것을 음악으로 듣는 오디오 북이라 해도 좋을까. 표현이야 하기 나름이겠지만, 무엇보다 코토바의 음악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색다른 청각적 경험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껏 코토바의 음악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의 뼈대를 찾는 재미가 있었다면, 이제 이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구체화해 직접 청자에게 들려주기를 택한다. ‘언어’라는 뜻을 가진 밴드 이름 ‘코토바’를 두고 코토바만의 음악 언어를 유추하고자 하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그 속에는 아마 밴드 자신도 있지 않았을까. 데뷔작 제목이기도 한 ‘(자신들만의) 언어의 형태’를 찾아가는 이들의 여정이 한 편의 SF 작품이 되어 [Humanoid operational]을 낳았다. 분산된 언어가 이야기로 뚜렷해졌다. 앨범에 담긴 키리에의 자각(自覺)은 아마 기나긴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할 거란 강한 예감이 든다. 코토바가 품은 커다란 이야기보따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풀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김윤하 / 대중음악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