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관조와 통찰이 담긴 앨범
김창완 / 나는 지구인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랫말과 시적인 정취를 담은 음악으로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 온 김창완. 1977년 겨울 〈아니 벌써〉를 시작으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개구장이〉, 〈찻잔〉, 〈가지 마오〉, 〈청춘〉, 〈회상〉, 〈너의 의미〉,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등 헤아릴 수 없는 명곡을 남긴 그룹 산울림을 이끌었고 2008년 결성한 김창완밴드의 리더로서 지금까지 꾸준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어느덧 일흔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47년차 뮤지션이다. 음악 외에도 오랜 기간 연기자로서 TV와 스크린에서 활약해 온 김창완은 화가로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팔방미인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여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올라 열광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탁월한 퍼포먼스와 ‘참된 어른의 진심이 묻어난 이야기’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20년작 《문(門)》에 이어 3년 만에 선보인 앨범 《나는 지구인이다》는 노년에 이른 아티스트의 통찰과 원숙함을 담아낸 작품집이다.
타이틀곡 〈나는 지구인이다〉는 “하나뿐인 지구에서 단 한 번뿐인 우리의 삶을 찬미하는 노래”다. 김창완은 모두가 행복한 삶을 꿈꾸며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소중한 터전, 이 아름다운 세상이 맞이한 위기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 세상이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여기저기 전쟁이 터지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병원이 폭격당하는 야만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정치가, 종교인, 학자, 교사, 경제인… 너 나 할 것 없이 탐욕과 이기에 쩔어 있습니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돼서 예술, 과학, 철학조차도 구걸하며 연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이러한 혼란스러운 현실을 직접적으로 신랄하게 꼬집거나 이러저러한 게 옳다는 계몽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아니다. “나는 지구인이다. 지구에서 태어났다. 지구에서 자라나고 여기서 어슬렁댄다. / 동산에서 해가 뜨고 서산에서 해가 진다. 달님이 지켜 주고 별들이 놀아 준단다. / 온갖 꽃이 만발하고 나비들은 춤을 추고, 새들은 노래하고 구름 둥실 떠 가고…”라는 가사는 기존에 우리에게 친숙한 산울림이나 김창완의 시어와 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 묘사와 서정적인 내용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욱 애처로운 절규처럼 느껴진다. 노래를 들으며 떠오르는 아픈 현실, 이미 치유가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게 아닐까 싶은, 포근한 꿈이 들어설 자리조차 사라져 버린 듯한 답답한 시대의 모습이 더욱 마음을 아리게 한다.
음악적 측면에서 〈나는 지구인이다〉는 그간 김창완이 해 왔던 직선적인 록이나 소박한 포크의 형태 대신 전자 음악 사운드를 바탕으로 복고풍 정서를 담은 신스팝이다. 업템포의 일렉트로닉 비트에 실어 담담하게 노래하는 김창완의 목소리는 강렬하진 않지만, 동요처럼 쉽게 귀에 들어오는 멜로디와 함께 은근하지만 강한 중독성을 표출한다. 단순함 속에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선율과 가사, 김창완밴드의 키보디스트 이상훈이 들려주는 따사로운 키보드 사운드, 그리고 호소력 짙은 노래가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멋진 곡이 되었다.
앨범 《나는 지구인이다》는 13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이틀곡 외에 12곡은 김창완이 연주하는 기타와 그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어쿠스틱한 곡들이다. 그는 〈나는 지구인이다〉를 제외한 앨범의 사운드 콘셉트를 어쿠스틱 기타 중심의 단출한 세션으로 정했다. 대부분 기존에 발표했던 작품 중에서 선곡이 이루어졌다. 산울림 시절의 곡들 중에서는 1978년작 두 번째 앨범에 담긴 꿈결 같은 매혹의 〈둘이서〉와 《제6집》(1980)의 아름다운 곡 〈찻잔〉, 《제7집》(1981)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청춘〉, 《제12집》(1991)의 예쁘고 서정적인 〈누나야〉와 〈무감각〉을, 그리고 홀로 작업한 작품들 중 1983년 발표한 첫 솔로 앨범 《기타가 있는 수필》의 〈식어 버린 차〉와 《문(門)》에 수록되었던 〈노인의 벤치〉, 〈시간〉,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엄마, 사랑해요〉를 골라 새 옷을 입혔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을 기타 연주곡으로 편곡한 〈월광〉과 동요풍 멜로디와 가사를 지닌 〈이쁜 게 좋아요〉는 〈나는 지구인이다〉와 더불어 이 앨범에 처음 수록된 곡들이다.
앨범 전체를 놓고 볼 때 〈나는 지구인이다〉는 곡의 주제나 사운드 면에서 이질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나머지 곡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음악적 테마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바로 “기타가 있는 수필”이다. 1983년 가을, 김창완이 서른 살이 되기 직전 발표한 앨범 《기타가 있는 수필》은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와 여러 단상(斷想)을 어쿠스틱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표출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40년의 세월을 건너 일흔을 앞둔 그는 《기타가 있는 수필 2》를 의도한 앨범을 완성한 것이다. 몇몇 곡에 은은하게 깔리는 키보드와 기타 외에 다른 악기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2023년 가을의 어느 날 스튜디오에 들어가 단 한 프로(녹음실 대여를 할 때 스튜디오에서 쓰이는 시간 단위로, 보통 1프로는 3시간에서 3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일컫는다) 만에 녹음을 끝냈다.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깊어진 원숙함과 때로 아련하게 때로 큰 무게로 마음에 와닿는 잊지 못할 감흥으로 짙은 여운을 남긴다.
그 정점에 〈노인의 벤치〉와 〈시간〉이 자리한다. “세월은 모든 것에 무관심했지만 추억을 부스러기로 남겼지. / 가끔은 생각이 나, 지나온 날들이. 그 시간들이 남의 것 같아…” 20대 시절 60대의 시각으로 노래한 〈청춘〉의 대척점에 있는 〈노인의 벤치〉에서 이제 노인이 된 화자가 들려주는 정서에는 무르익은 관조와 체념의 미학이 담겨 있다. 〈시간〉은 또 어떠한가.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게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달콤한지, 그걸 알게 될 거야. / 영원히 옳은 말이 없듯이 변하지 않는 사랑도 없다. 그 사람이 떠난 것은 어떤 순간이 지나간 것. 바람이 이 나무를 지나 저 언덕을 넘어간 것처럼…” 이런 통찰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 깊이 사무치는 김창완 특유의 말투와 억양이 실린 내레이션, 읊조리듯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 두 눈이 촉촉히 젖어 든다.
다른 곡들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말할 수 없는 은은함과 끝 모를 깊이를 머금은 정취가 가슴속에 스며들고는 이내 물속의 잉크가 번지듯 온몸에 퍼져 아스라한 도취로 이끌어 준다. 이 앨범의 연주와 노래를 원곡과 비교하는 건 딱히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나는 지구인이다》에서 김창완이 고르고 다시 부른 곡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그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무게를 느끼기도 하고 왠지 모를 처연함에 뭉클하기도 하지만 곡 하나하나가 모두 나를 따스하게 감싸 주며 이는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된다. 김창완의 곡과 잔잔한 노래가 지닌 매혹이자 힘이다.
글 / 김경진 (대중음악 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