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주와 지인들 [시간은 느리게 흘렀죠]
1. 먼 나라 이야기 (feat. 김민규)
2. 지금은 잘 생각나질 않네
“윤병주와 지인들”이라는 흥미로운 밴드명에서 느껴지는 첫인상은 예스러움이다. 윤병주가 해 왔던 헤비하고 블루지한 음악을 떠올리게 되는 탓도 있고 “지인들”이라는 단어에 담긴 왠지 묵직하고 진득한 어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름만으로 보면 밴드의 구성원이 윤병주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친구)이 아닌 아는 사람(지인)들이라는 건데, 음악적 지향점이 같은 연주자들이 모여 있을 테니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지닌 이들이 오래된 것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표출해 낼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소울트레인(곽경묵)과 김창완 밴드(최원식), 로다운 30(이현준), 하드피아노/전상민 트리오(전상민) 등을 거치고 탄탄한 실력으로 인정받아 온 뮤지션들이 여기 포진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2020년 초 선보인 싱글 [거리]와 [우연히], 같은 해 말 공개한 [항구의 밤]을 통해 밴드의 색깔을 확고히 보여 주었다.
그건 다름 아닌 “잼 밴드”다. 1960년대 사이키델릭의 시대 이후 여러 밴드들이 무대에서, 앨범에서 행한 잼 세션의 핵심은 즉흥성과 확장성, 그리고 자유로움이었다. 재즈에서 발전한 임프로비제이션, 즉 다채로운 코드와 리듬 변화, 그루브를 내세운 즉흥 연주의 전통은 클래식 록 시대의 그레이트풀 데드나 크림, 올맨 브라더스 밴드부터 90년대 이후의 데이브 매튜스 밴드와 블루스 트래블러 등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윤병주가 염두에 둔 건 이러한 잼 밴드의 모습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런 잼 밴드들처럼 “자유롭게 연주해 보고자” 시작한 프로젝트가 윤병주와 지인들이다. 그는 “자기 곡이든 남의 곡이든 상관없이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펼치는 연주”를 떠올리며 커버곡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국 포크와 블루스의 거장 이정선의 곡들을 멋지게 커버했던 밴드는 3년 만에 새로운 결과물을 완성했다. 이번에도 그 대상은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는 이름이다.
윤병주와 지인들이 선택한 두 번째 아티스트는 오래 전 대단히 혁신적이고 신선한 음악으로 가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던 그룹 산울림이다. 누군가 산울림의 곡을 커버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워낙 명곡이 많기도 하지만 숱한 곡들에 노랫말이나 선율, 곡의 구조와 사운드 전개 등 여러 면에서 세월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는 기발함과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어렵지 않게 풍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영감을 전하기 때문이다. 윤병주는 소위 “히트곡”과는 거리가 먼 곡들을 골랐다. 그가 어린 시절 가장 먼저 사서 듣고 좋아했던 산울림 앨범들에 수록된 김창완의 작품들로, 1981년작 7집의 [먼 나라 이야기]와 1982년작 8집의 [지금은 잘 생각나질 않네]다.
커버 혹은 리메이크 곡에 가지는 관심의 핵심은 오리지낼리티의 재현이 아닌 “새로운 해석”이다. 기존의 것을 어떻게 해석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고 얼마만큼의 감흥을 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산울림의 경우 김창완의 목소리 자체가 워낙 독보적인 영역에 자리하는 탓에, 산울림 커버 곡에서는 노래보다는 편곡 및 연주의 패턴과 사운드의 질감에 집중해 듣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윤병주와 지인들은 애초 목표한 “잼 밴드”라는 의도에 걸맞게 탁월한 연주를 담아 냄으로써 산울림의 곡에 매혹적인 새 옷을 입혔다.
[먼 나라 이야기]는 ‘죽음’이라는 단상을 블루지한 연주와 나른한 보컬에 실어 노래했던 곡이다. 윤병주와 지인들은 각 연주자들의 섬세하고 매끈한 연주와 함께 블루스 록과 몽환적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펼친다. 원곡의 두 배 가까운 러닝 타임을 채우는 수려한 연주를 통해 이들은 의도했던 “잼 밴드”로서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다. 무심한 듯 나직하고 느릿하게 노래하는 윤병주의 목소리(1절)와 게스트로 참여한 델리 스파이스의 김민규가 또박또박 들려주는 노래(2절)는 찬연히 빛나는 꿈결 같은 간주와 후주를 부드럽게 연결해 준다. 곽경묵-윤병주-김민규로 이어지는 유려한 기타 솔로, 전상민의 몽롱한 키보드 연주는 원숙한 잼 세션의 아름다움, 제대로 된 음악이 얼마나 짙은 즐거움과 짜릿함을 전할 수 있는지를 명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산울림식 로큰롤 사운드를 담았던 [지금은 잘 생각나질 않네]는 보다 강조된 그루브와 함께 정통 로큰롤로 거듭났다. 고풍스럽기까지 한 흥겨운 리듬 속에서 힘차게 넘실거리는 기분 좋은 활력은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이 되어 온몸을 감싼다.
이전에 [거리]에서 이정선의 해바라기 1집(1977) 커버를, [우연히]에서 원곡이 수록되었던 7집 앨범 [30대](1985)를 오마주했던 것처럼 밴드는 이번에 산울림 특유의 앨범 커버 디자인 포맷을 따랐다. (메탈코어 밴드 바세린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한 디자이너 이기호의 초등학생 아들이 그린 그림이다.) 두 곡을 담은 싱글의 표제인 [시간은 느리게 흘렀죠]는 [지금은 잘 생각나질 않네]의 가사에서 따온 제목이다.
글 / 김경진 (대중음악 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