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 (feat. 이삭) - 덕호씨
가끔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
처음부터 리셋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친 마음을 안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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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대학가요제에서 허니첵스로 데뷔한 이래 밴드 슈퍼키드의 허첵에서 덕호씨가 되기까지. 데뷔 20년 차를 맞이한 그의 음악을 음’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창작활동을 20년 동안 이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세계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그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작품들은 아티스트의 서사가 되고, 어느 시점이 오면 아티스트의 삶은 작품과 동기화된다.
삶이 작품이 되어버린 20년 차 아티스트에겐 어떤 악기로 어떤 선율을 표현했느냐 보다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덕호씨의 이번 노래 ‘낯선 곳’의 가사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시간이다. ‘반짝이던’ 과거와 ‘작아진’ 현재, 그리고 ‘아주 멀리’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 욕망.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아우르며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우리에게 시간은 과거로부터 날아온,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여겨진다.
그 화살이 만드는 일직선 안에서 우리는 과거 경험들의 영향을 받아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우리의 관점은 언제나 시간에 엮여 전개되고,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간성temporality 이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 말했다. 우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고, 어떤 순간도 온전히 순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순간은 곧 과거의 잔향으로, 미래에 대한 기대로 희석되기 때문이다. ‘별빛이 반짝이던 날’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때‘의 기분으로만 남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이 죽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심리적으로 늘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으며,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 따위의 답 없는 질문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죽음’이라는 마지막 장면만은 유일하게 확실하다. ‘죽음’이 상징하는 시간의 유한성은 너무나 공포스럽지만, 그로 인해 삶의 의미를 갈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성취해 낼 무언가에서 찾는다. 하지만 성취와 동시에 그 의미는 사라지기에 언제나 새롭고 다른 것들을 쫓는다. ‘아무도 날 모르는’ ‘낯선 곳으로’ ‘아주 멀리 떠나’는 일탈을 꿈꾸며 새로운 일직선, 또 다른 삶의 궤적을 만들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엔 다 부질없다. 우리의 핵심을 이루는 시간성temporality 안에서 언제나 마지막은 죽음뿐이고, 우리가 갈망해 왔던 그 행복한 순간들은 지나고 나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아픈 깨달음만 남기고 사라진다. ‘별빛이 반짝이던’ 밤이 지나고 ‘햇살이 눈부신’ 아침이 오면 ‘반짝이던’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도리어 ‘고작 이것밖에 안 된’, ‘작아진’ 내가 드러나고, ‘부끄러운 마음’은 커져만 간다.
우리가 끊임없이 ‘반짝반짝 빛나던’,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 묻힌 채로 현재를 살면서 빼앗긴 행복했던 그 ’순간’을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어느 특정한 순간의 기분 상태이다. 우리에겐 순간을 붙잡을 방법이 없기에, 그 순간의 감정은 금세 과거의 기억 속으로 매몰되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멀어진다. 우리에게 사실상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순간의 감정도 비현실적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런 아픈 결론은 시간을 일직선으로 인식하는 우리가 안타깝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Sad but true.
시간성의 무자비한 숙명으로부터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어낼 방법은 없을까. ‘순간에 더욱더 충실하라’ 따위의 상투적인 말로 이 절망적인 상황을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우주가 여러 힘들의 조합과 재조합을 무한히 반복하듯, 우리의 삶 역시 같은 형태로 영원히 반복한다는 개념)의 관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의 주장처럼 시간이 일직선이 아닌 끊임없이 반복되는 원의 형태라고 한다면, 모든 순간들은 그저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재현되는 중일 것이다. 허첵의 왁자지껄한 음악이나 ‘작아진’ 덕호씨의 음악이나 모두 무한히 재생되고 있다면 삶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도, 순간이 품고 있는 의미는 삶이라는 원의 형태 곳곳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존재에 대해 던질 질문은 ‘이 삶을 다시 살기 원하는가?’이다. 이 질문에 ‘예’라는 긍정의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내야 할까?
니체는 위로를‘쓰러져가는 이에게 그보다 안전하고 높은 곳에서 건네는 말’이라고 설명하며, “너에게는 지금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 라고 말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말했다. 자신을 위로할 자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자기존재에 대한 명예의 상징으로 여김으로써 다시금 일어설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영원회귀와 그의 위로에는 ‘희망’의 실마리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위로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고, 이 모든 게 계속해서 되풀이된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오롯이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난관을 이겨낼 수 있다는 니체만의 삭막한 위로처럼 가끔은 ‘희망’을 원래 있던 상자에 넣어둘 필요가 있다.
‘희망’은 욕망의 또 다른 형태이기에 결국엔 우리에게 시간성 temporality이라는 굴레를 덧씌우기 때문이다. 작아질 대로 ‘작아진 마음’이 미울지라도 말없이‘안아주는’편이 훨씬 더 큰 위로 일 수 있다는 점에서 덕호씨의 이번 처방은 여러모로 현명해 보인다. 어찌 보면 이 노래는‘ 무거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홀가분해진 지금의 덕호씨가 슈퍼키드 시절의 허첵에게, 혹은 과거의‘빛나던’ 허첵이 지금의 ‘작아진’ 덕호씨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가끔은 독이 되는 것처럼, 가끔은 과거의 나 혹은 지금의 나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것이 삶을 훨씬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 김내현 (밴드 ‘로큰롤 라디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