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 SAGA [연애들]
음악이란 늘 신비한 것이다. 종이 수 장을 가득 채울 이야기도 단 하나의 문장도 노래가 된다. 노래가 되었어도 그것은 여전히 긴 이야기이며 간결한 문장이다.
그래서 그 힘을 빌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모두가 기다리는 그 이야기를. 헌데 망망대해 같은 빈칸을 보며 그 어떤 단어도 시작할 수 없었다.
고백이나 키스로 시작된 연인들을 사랑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돌아보니 그것은 현실로부터 도망이었고 나는 찰나의 자유를 사랑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잦은 이별의 가벼운 상실감은 모든 연애에 걸쳐 나를 약하게 만들 뿐이었다.
사랑을 알 수 없어도 노래는 만들어졌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내게 물으면서도 노래는 계속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아무것도 아닌 것과 무엇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다름을 알았다. 나의 노래는 사랑과 연애 사이에 결락된 것이 무엇인지 찾고 있었다.
연애는 두 사람이 가진 불안과 타인에 대한 불확신을 전제로 결속된다. 서로를 통해 세상의 확실한 위안과 희망을 얻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 1번 트랙의 ‘불확실’이다.
구애라는 행위, 사랑을 구하는 마음은 인간에게 다소 처절하게 느껴진다. 보이지 않던 갑과 을의 관계가 2번 트랙 ‘나의 구애’를 통해 드러난다.
그럼에도 사랑을 발휘하는 몸짓은 공평하고 완전하며, 깨어지지 않는 애정을 약속한다. 3번 트랙 ‘소음의 밤’ 은 그런 몸짓의 언어를 해설하고, 실은 우리가 잔인할 만큼 솔직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서로가 채우지 못한 결핍은 사랑이라는 열차를 탈선시키고 어느새 우리는 평행으로 달린다. 4번 트랙 ’연애들’ 은 더 이상 맞닿을 일없는 시간들을 자조적인 태도로 돌아본다.
다시 삶을 향해 달린다. 그렇지만 늘 궁금하다. 우리에게 사랑이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언제 사라졌는지 얼마나 남아있는지. 그래서 5번 트랙 ‘진실 말고 진심을 원해요’는 연애의 종결(사실)과 별개로 진심의 실체를 묻는다. 울고 마는 순간마저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
데모를 완성하고 약 7개월의 작업 기간을 거친 첫 EP [연애들]의 목표는 지속 가능한 음악의 시도였다.
평소 좋아하는 곡, 동경하는 음악들을 레퍼런스 삼아 편곡하고, ‘내’ 가 지속할 수 있는 음악인지 질문하며 작업했다. 완성도 있는 음악을 위해 친구들(이새, 이민형, 김우주)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들은 기꺼이 메인 연주자로서 편곡을 완성하고 든든한 조언자가 되었다.
‘불확실’, ‘나의 구애’는 장르적인 색채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몽환적인 기타로 시작하여 퍼지한 아웃트로로 마무리되는 구성, 반복되는 기타의 탑 라인, 아득한 공간감은 연애라는 관계 속에서 하릴없이 부서지는 마음을 표현했다. ‘불확실’의 강렬한 아웃트로가 포인트이다.
수록곡 중 유일하게 데모가 공개된 ‘소음의 밤’ 은 고민이 많았다. 데모의 투박함은 유지하면서 앨범의 타이틀로 내세울 만큼 매력적인 노래가 되길 바랐다. 데모의 구성을 바꾸고 사운드는 기타(이새)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완성했다. 녹음 현장에서 의외의 변수는 보컬의 뉘앙스였다. 강하게 뻗어나가는 느낌보다 ‘노래하듯’ 부르는 느낌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받아 훨씬 부드러운 보컬이 완성됐다. 본능과 혼돈 속에서 깨달은 이야기를 망설임 없이 전하는 독특한 캐릭터가 완성되어 만족스러웠다.
’연애들’ 은 가볍고 담담하게 들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첫 소절을 떠올리고 곡의 전체를 완성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비록 연애는 실패했어도 어쿠스틱 기타의 리듬감과 유쾌한 신스의 멜로디로 웃어 넘겨보는 곡이다.
마지막 곡 ‘진실 말고 진심을 원해요’ 는 목소리와 호흡에 힘을 실었다. ‘속수무책’처럼 가사에 많이 쓰지 않는 표현을 시도했다는 것이 나의 소소한 기쁨이다. 완성되고 보니 이 노래는 겨울에 뱉어보는 한숨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앨범에 대한 소개를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듣는 이와 함께 이 이야기의 결말까지 도달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만남과 이별의 노이즈 때문에 밤잠을 설쳤고, 떠난 사람들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끙끙 앓지 않았던가. 이제 연애든 이별이든 사람이든 끝난 것은 아무렇지 않고, 잊혀진데도 손쓰고 싶지 않다. 다만 노래하고 싶다.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