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의 경지에서 빚어낸 장인의 도기처럼.
역경을 넘어 초월에 이르고자 하는 집요한 염원의 발화
‘씨모에 (CIMOE)’ 정규 2집 <초[超]>
노자의 책 ‘도덕경’ 내용 중 ‘대교약졸’이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크게 솜씨가 좋은 것은 오히려 서툴다’ 정도의 뜻이다. 언뜻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진정한 뛰어남은 피상적으로 드러나는(혹은 드러내려는) 뛰어남을 넘어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 깊이가 와 닿는 경지’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말 뛰어난 경지는 기교의 경쟁을 초월하여 정신적으로 높은 영역에 이를 때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씨모에 (CIMOE)’는 바로 그 ‘높은 정신의 영역’에 이르는 길을 추구하며 이를 탐색하고 좇는 여정에서 비롯된 성찰과 고뇌, 또 다양한 정념들을 장르 음악인 힙합이라는 그릇에 담아 표현해온 음악가다. 다소 설익었다는 인상이 짙었던 15년 데뷔작 이후 4년의 공백을 거쳐 19년에 발매한 첫 정규앨범 <CIMOESSAY>에서부터 이러한 특징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여, 이후 그가 발표해온 작품들 전반의 공통적 주제의식으로 자리잡아 씨모에라는 음악가의 캐릭터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음악적인 면에서 드러나는 그만의 개성은 특유의 문어체 노랫말에 있다고 할 것이다.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비장한, 또한 다양한 은유와 함축으로 가득한 그의 문어체 가사는 랩의 형식으로 발화되었을 때 마치 시가 등의 운문을 노래로 옮긴 듯한 감각으로 다가와 기존의 구어체 랩들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그의 이러한 작법은 – 아티스트 스스로도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는 – 피타입, 가리온의 메타 등 한국 힙합 1세대를 상징하는 리리시스트(Lyricist)들의 영향이 느껴지는데, 특히 영문 사용이 극단적으로 배제되는 반면 한자어 표현들이 빈번하게 사용되는 부분에서는 역시 한국 힙합 1세대의 파격적인 스타일리스트였던 MC 성천의 스타일과도 맞닿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여겨진다.
<초[超]>는 씨모에가 19년 정규 1집 이후 5년 만에 발표하는 정규 2집으로 21년 초에 발표한 싱글 <후일담(後日談)> 이후 약 3년의 긴 시간을 공들여 완성한 결과물이다. 앨범 제목처럼 ‘초월’을 핵심 주제로 다루는 작품으로 역경을 넘어 초월적인 존재, 즉 불교 사상의 ‘여여 (如如)’, 혹은 니체 철학의 ‘위버멘쉬(Übermensch)’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서사의 큰 줄기로 삼는다.
드라마틱한 나레이션의 인트로 ‘초월의 단초’가 여정의 시작을 선언한 후, 이어지는 ‘낙타의 서(書)’에서부터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사자의 생(生)’, ‘힘에의 의지(時代精神)’를 거쳐 ‘UBERMENSCH’(위버멘쉬)’ 에 이르는 작품 초-중반부는 니체 철학의 다양한 개념들을 각 트랙의 테마로 삼아 ‘역경에서 초월로’ 향하는 주 서사를 전개하는 작품의 핵심부다. 니체가 이야기한 인간 정신의 3단계 변화인 낙타(사회 관습과 규범에 순응하는 상태) – 사자(기존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자유의지) – 어린아이(천연의 상태로 돌아가 삶을 유희로 승화하는 초월적 상태)를 다루고, 각각의 단계에서 더 높은 가치로 이행하려는 의지(힘에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침내 그 의지의 지향점(위버멘쉬)에 도달하려 한다. ‘힘에의 의지(時代精神)’는 그 중에서도 백미로 꼽을 만한 트랙. 콰이어 샘플링의 적절한 배치로 장엄한 무드를 조성하는 비트와 씨모에의 강렬한 랩이 어우러지는 이 곡은 동학 농민 운동(파랑새 흐느낀 피고 진 녹두), 촛불 혁명(광화에 물드니 민초의 촛불) 등을 은유하는 노랫말과 함께 체제에 굴복하지 않는 뜨거운 정신을 비장하게 노래한다. 특히 故 노회찬, 故 신해철 등 ‘역경에서 초월’을 실천한 것으로 아티스트가 여기는 이들의 육성을 샘플링하여 곡 사이사이에 배치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인데 곡 말미에 마주하게 되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뜨거운 음성은 실로 가슴 저릿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초월로 향하는 서사의 마침표라 할 수 있는 ‘UBERMENSCH’는 ‘이그니토’가 특유의 강렬한 스타일로 포문을 열어 앞선 곡에서 한껏 고양된 정서를 최대치로 증폭시키는 곡으로, 후반부 씨모에의 파트에선 비트의 변주를 통해 듣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앨범의 전체 구성상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트랙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후반부를 시작하는 스킷 트랙 ‘웅천요(熊川窯)’는 경남 진해에 위치한 요장(도자기를 굽는 공방) ‘웅천요’의 최웅택 사기장과의 짤막한 대담이다. 최웅택 사기장은 조선시대 도공들의 전통적인 도자 문화를 현재에 재현하는 외길을 우직하게 정진해 장인의 경지에 이른, 앨범의 테마인 ‘역경의 초월’을 실제로 체화한 인물. 그가 자신의 철학과 삶에 대한 소회를 덤덤한 어조로 얘기하는 이 스킷은 앨범의 주제의식을 현실 안에서 구체화하는 가운데 앨범의 구성상에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하여 종장으로 향하는 영리한 장치가 되어주고 있다. (한편 최웅택 사기장이 빚어내는 조선 찻사발 고유의 생략과 불완전의 미학은 씨모에가 추구하는 ‘무심의 미학’과 완벽하게 맞닿아 있어 아티스트는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기며 예전부터 연을 맺어오고 있다고) 이어지는 ‘반야로(般若路)’, ‘여여(如如)’는 강렬했던 앨범 전반부와 달리 다소 차분하고 관조적인 무드의 비트와 함께 내용적으로는 불교 사상의 ‘열반’의 개념을 가져와 재차 초월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특히 ‘여여’에서는 – 역시 아티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 故 법정 스님의 음성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이윽고 대미를 장식하는 ‘HAMARTIA’(하마르티아)’는 인트로인 ‘초월의 단초’와 마찬가지로 나레이션만으로 이루어진 비장한 분위기의 엔딩 트랙. 수미상관의 구성으로 구성적인 완결성을 취하고자 한 세심한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앨범 <초[超]>는 아티스트가 긴 시간 집요하게 추구해온 주제의식의 집약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그 비장하고도 철학적인 세계관을 음악으로 구현하는 작업의 파트너로 비교적 신진 프로듀서에 속하는 ‘콘다 (Conda)’가 프로듀싱 전반을 주도, 때로는 장엄한, 때로는 관조적인 정서의 사운드스케이프를 빚어냈으며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 프로듀서 ‘제이에이 (JA)’ 역시 몇몇 트랙에서 다시금 힘을 보탰다. 그밖에 ‘DJ Wreckx (디제이렉스)’, ‘Son Simba (손 심바)’, ‘DJ Trickster(디제이트릭스터)’, ‘IGNITO (이그니토)’, ‘헝거노마 (Hunger Noma)’ 등 여러 동료 플레이어들의 가세 또한 작품의 구성을 한층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들.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주제와 각 곡의 내용들, 또 이를 긴 호흡과 시종 무거운 무드 안에서 풀어가는 구성 등 이래저래 최근 힙합 장르의 트렌드와는 정반대의 스탠스에 있는 작품이다. 다만 최근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사랑 받은 이 장르의 주요 작품들 중 상당수가 트렌드와 무관하게 시간과 공을 들여 빚어낸, 완성도 높은 ‘앨범’들이었다는 점에서, 3년의 긴 시간을 공들여 잘 벼려진 이 앨범 또한 많은 청자들 사이에서 활발히 공유되고, 들려지고, 또 이야기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해본다.
김설탕 @sugarule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