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을 처음으로 녹음했던 첼리스트 또한 카잘스였다. 다만 한기지 아쉬웠던 것은 HMV 음질의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 음반은 체다 사운드 시스템으로 그 문제도 해결되어 놀랄 만큼 음질이 개선되었고 귀에 거슬리는 장애는 말끔히 제거되었다. 이 기념비적인 첫 전곡녹음에서 카잘스는 3번 A장조 (1930년 녹음) 는 오토 슐호프와 함께, 나머지 4곡은 폴란드 출신의 미예치슬라브 호르조프스키(1892-1993) 와 협연했다. 그리고 그 최초의 전곡 녹음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불멸의 명연으로 남아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한 첼리스트가 카잘스였듯이,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을 처음으로 녹음했던 첼리스트 또한 카잘스였다. 그리고 그 최초의 전곡 녹음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불멸의 명연으로 남아 있다. 다만 한기지 아쉬웠던 것은 음질의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인데, 체다 사운드 시스템으로 그 문제도 해결되어 놀랄 만큼 음질이 개선되었고 귀에 거슬리는 장애는 말끔히 제거되었다.
이 기념비적인 첫 전곡녹음에서 카잘스는 3번 A장조 (1930년 녹음) 는 오토 슐호프와 함께, 나머지 4곡은 폴란드 출신의 미예치슬라브 호르조프스키(1892-1993) 와 협연했다.
30세의 청년 카잘스가 14세에 불과한 폴란드 출신의 신동 호르조프스키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그 비범성을 알아보았고, 그때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F장조를 함께 연주한 이래 카잘스는 이 신동의 음악에 대한 경이적인 감각과 혜안에 대해 거듭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이 어린 소년과 함께 연주하는 것이 언제나 즐거웠었다. 신동들이 겪기 쉬운 갈등과 위기가 호르조프스키를 엄습할 때마다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카잘스였다.
그렇게 해서 오랫동안 실내악 활동을 함께 했던 그들이 HMV의 런던 스튜디오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처음 녹음한 것은 첫 만남으로부터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였다.
소나타 4번 C장조를 1936년에 녹음한데 이어 3년 후인 1939년에는 다시 1번 F장조, 2번 G단조, 5번 D장조를 녹음했으나 3번 A장조는 끝내 협연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1930년 호토 슐호프와의 녹음이 카잘스에게도 흡족했고, 호르조프스키도 슐호프의 연주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카잘스는 그보다 훨씬 연하였던 호르조프스키를 가리켜 언제나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 라 불렀고, '모든 점에서 서로 말없이 통할 수 있는 유일한 벗'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교감 때문에 그들은 기질이 서로 달랐으면서도 함께 연주할 때는 더할 나위 없는 동질성을 보여주고는 했다. '마치 한 사람이 두 개의 악기를 연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연주자가 하나의 넋으로 융해되어 있다' 는 평을 들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호르조프스키는 실내악의 활동에 주력했지만 독주자로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88세에 녹음한 바흐의 평균율 전곡 연주는 불멸의 명반으로 남아 있다.
카잘스와 함께 3번 A장조 이외에도 미뉴엣 G장조의 녹음을 남긴 오토 슐호프는 카잘스가 특히 높이 평가했던 피아니스트였고, 카잘스 뿐만 아니라 예뇌흐바히, 브로니슬라프 후버만, 얀 쿠벨릭, 프리츠 크라이슬러, 가스팔 카사도 등 20세기 전반기에 빛났던 현악 거장들의 반주자로서 활약했던 피아니스트였다.
이 순 열 (음악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