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슬러 - 음악평론가 이순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F장조 '봄'
일종의 습작이랄 수 있는 작품 12번의 세곡을 마무리짓고 난 다음 좀 더 성숙한 솜씨로 다듬어진 이 작품은 베토벤의 소나타 중 가장 환한 빛을 띠고 있다.
트러스코트(Harold Truscott)는 1악장의 주제가 클레멘티의 소나타(op. 25-4)와 비슷하다는 것을 지적했지만 그 서정성은 차라리 슈베르트로 통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소나타가 작곡되었던 1801년 무렵,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귓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베토벤에게 봄이 아주 멀리 있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봄에 대한 동경이 더욱 간절한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쨋든 유창하게 흐르는 듯한 첫 주제가 봄의 화사함을 연상시킨다는 뜻에서 후세에 붙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 소나타에 <봄>이라는 이름은 잘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밝은 빛으로 충만한 듯한 이 소나타의 표면을 꿰뚫어보면 뭔지 모를 비감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음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내면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조용하게 펼쳐가는 2악장 아다지오에서 그 비감은 더욱 짙어간다. 그리고 3악장 또한 베토벤의 스케르초가 거의 다 그렇듯이 해학 속에도 겉은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얼핏 듣기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 쫓고 쫓기듯이 경쾌하게 껑충거리고 있는 듯 하지만 연속적인 쉼표와 신코페이션의 리듬으로 비틀거리면서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숨결 속에는 깊은 비애가 담겨있다. 그러나 마지막 악장에서는 헐떡이던 숨결도 어느 정도 정돈되지만, 파랑의 적막한 분위기가 감돈다.
바이올린 소나타 8번 G장조 op. 30-3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1번에서 3번까지 3곡(op. 12)이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있듯이, 6번에서 8곡(op. 30)까지 1802년 32세 때 작곡된 6번에서 8번(op. 30) 까지의 3곡도 또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있다.
의외성의 빛으로 비등(沸騰)하는 첫 악장은 봄의 열락처럼 벼간란 설레임의 도약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베토벤 스스로 '빠르지 않은 템포로 아주 우아하게'라고 표시한 2악장은 메뉴엣 전형적인 메뉴엣 악장이지만, 첫 악장의 격정을 가라 앉히려는 것처럼 차분하게 흐른다. 그러나 론도 형식의 피날레 악장에서는 첫 악장의 활기가 되살아난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장조 op.47 '크로이처'
크로이처 소나타, 그것은 드높음을 향한 불길과 질주의 화신이다. 더블 스토핑의 모티브~ 하나의 공간에 포용된 네 개의 소리가 분열하면서 뒷 소리가 앞 소리를 뒤따라 가는 처절한 순간질주 속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긴장감이 잉태한다. 그것은 무섭게 벌어진 공간 넘어로 두 사람이 서로 닿지 않은 손을 맞잡으려고 하는 시시티네 사원의 천장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케 한다.
크로이처 소나타, 그것은 정상으로 날아오른 다음, 다시 한번 날개를 펼치려 하면서도 좌절의 사슬이 조여올 때의 고독하고 처절한 노래이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 G장조 op. 96
이 소나타는 1812년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자끄 로드를 위해 작곡되었으나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이자 그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다.
삶의 질곡 속에서 무수한 좌절을 겪으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쓴 이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베토벤도 작품 12에 나타났던 부드러우면서도 싱싱한 세계를 되돌아보고 있는 듯 하다. 그런가하면 이따금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더욱 더 자신의 껍질 속으로 침잠하게 되는 그의 말년의 편모를 엿보이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에는 폭풍전야의 젊은 시절의 싱싱함과 만년의 체관을 느끼게 하는 평화로우면서도 밝은 빛이 엇갈려 있다.
그런가 하면 체면을 차리듯 머뭇거리면서 등장하는 첫 악장의 주제는 정중하고 모가 나지 않는 중년의 면모를 엿보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소나타는 베토벤의 장르적 생애의 축도(縮圖)라 할만 하다.
슈베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op. 162. D. 574
슈베르트는 1816년 19세 때 세 개의 소나타를 완성한 다음 그 이듬 해 소나타 A장조를 작곡했다.
슈베르트 자신은 이 세 개의 소나타에 '바이올린 반주가 곁들인 피아노 소나타'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1836년 디아벨 리가 그 악보를 처음으로 출판했을 때는 '3개의 소나티네'로 그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한편 디아벨리는 1851년 Awkd 소나타를 출판했을 때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2중주곡(Duo)'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나티네' 라든가 '두오'라는 명칭은 디아벨리의 상업적인 의도로 붙여진 것이지만, 지금도 대체로 그 이름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모두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A장조 소나타의 첫 악장은 율동적이면서도 애수어린 피아노의 저성부에 이끌려 바이올린이 명상에 젖은 듯한 주제를 노래한다. 애절한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파고 드는 2주제는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2악장 스케르초는 베토벤을 연상케 하면서도 슈베르트의 체취가 배어있고, 안단티노의 3악장은 주제와 3개의 변주곡으로 자여있다. 소나타 형식을 취한 피날레 악장에서는 스케르초풍의 제1 주제와 흐르는 듯 유동하는 제2주제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3번 C단조, op. 45
그리그는 20대의 청년기(1865년 및 1866년) 두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한 후 이 장르에 대해서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여년이 지난 1886년, 또 하나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세 번재의 작품을 쓴 것은 때마침 톨드하우겐(베르겐 근교)로 그리그를 찾아온 이탈리아의 여류 바이올리니스 테레지나 투아의 연주를 듣고 바이올린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1886년 가을에 착수된 이 소나타는 그 이듬 해 1월에 완성되었고, 그 해 겨울 그리그 자신의 피아노와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보드스키에 의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다.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가장 사랑받고 가장 빈번하게 연주되는 이 소나타는 전곡을 통해 북구적인 정조(情操)와 비극적인 정서, 극적인 긴장감과 깊은 우수가 어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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