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만 잘 연주해야하는 음악
“쇼팽은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 쇼팽을 많이 연구했거나 쇼팽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청중 앞에서 미스 터치를 줄줄이 내며 엉망으로 연주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측면 즉, 연주가로서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할 성실성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연주가는 어떤 식으로든 항상 진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말은 쇼팽음악을 해석하는 방법의 독특함을 암시하며, 섬세한 통찰력이 배제되고 연주자 자신의 자의적인 상상력이 발동해 달콤하게만 연주되는 행태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흔히 피아노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가장 쉽게 대하는 것이 모짜르트 음악이요, 고급과정으로 가면 자주 만나는 음악이 쇼팽의 음악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음악을 많이 공부한 대가급 피아니스트들이 ‘모짜르트의 음악이나 쇼팽의 음악이 어렵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들었을 것이다.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쉽게 칠 수 있는 이러한 음악들을 대가들이 어렵다고 할 때는 물론 쳐내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음악들이 표상하는 맑고 순수한 세계와 논리, 음의 절묘한 절제와 조화 등 매우 고차원적인 표현을 이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쇼팽의 음악은 모짜르트의 음악과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쇼팽의 음악은 모짜르트의 음악만큼이나 가장 대중적인 음악에 속한다. 피아니스트라면 쇼팽음악을 단번에 못쳐낼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쇼팽은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말은 여전히 쇼팽의 음악이 모짜르트의 음악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쇼팽의 음악이 그렇게 조심스러워야 하는가? 이제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쇼팽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의 음악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파악이 전제되어야 한다.
쇼팽에 대한 올바른 인식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다” 주지하듯이 안톤 루빈스타인이 한 말이다. 굳이 루빈스타인이 그렇게 낭만적인 표현으로 격찬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쇼팽이 비할데 없이 독특한 피아니즘으로 인간의 감성을 극히 섬세하게 그려낸 낭만적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낭만적인 사람이었을까? 슈만 아니, 바그너 만큼 낭만적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더 낭만적인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쇼팽에 대한 믿을 만한 전기를 읽어 보면, 그는 오히려 흔히 이해되고 있는 이미지와는 상이한 면을 많이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쇼팽은 그 누구의 것과도 닮지 않은 지극히 낭만적인 감성의 소유자였지만, 정작 그는 ‘낭만주의’라는 말을 싫어했다. 그러므로 그의 주위의 낭만주의를 표방하는 웬만한 작곡가는 대개 그의 부정적 비평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쇼팽은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아주 수준 낮은 것으로 보고 멸시했는가 하면, 종종 자주 비교되는 리스트의 음악에 대해서는 지루하고 공허한 것이라고 비판하기 일쑤였다. 또, 슈만의 작품 '카르나발(Carnaval)'에 대해서는 “그건 음악도 아니다”라고 일축해 버렸고, 멘델스존의 작품은 아예 무시해 버렸다. 슈베르트에게는 관심도 없었고, 심지어 위대한 악성 베토벤 마저도 자신의 음악세계를 방해하는 존재 정도로 생각했었다.
물론 안하무인격의 독선을 휘두른 쇼팽의 이러한 견해에 편승해 덩달아 그런 위대한 음악가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대신 그가 왜 그런 태도를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보이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사실, 그의 이러한 독선적 모습의 이면에는 항상 그의 음악관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많은 낭만주의 음악가들을 비판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그러면 그 기준이란 무엇인가? 쇼팽의 낭만적 서정에 휘청거릴 정도로 빠져있는 애호가들은 상당히 아이러니컬하게 느끼겠지만, 그토록 풍부한 낭만적 감성의 소유자 쇼팽이 가장 신봉한 작곡가는 바흐와 모짜르트였다.
바흐와 모짜르트는 쇼팽에게 있어서 좋은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을 구분하는 하나의 시금석이었다. 다시말해 어떤 음악이 훌륭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점은 바흐와 모짜르트의 고전적 형식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는 이 위대한 두 작곡가의 고전적 형식을 존중했다. 쇼팽과 고전주의는 일견 양립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음악이 고전적 형식을 운운하기에는 너무도 로맨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팽은 모든 낭만주의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사람인 동시에 가장 고전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구사하는 형식은 항상 완벽한 고전적 기초 위에 세워졌고, 그의 작업은 매우 정교했다. 그는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의미없는 장식을 추가하거나 삽입하는 일이 없었고, 작곡을 끝낸후에는 더 이상 추가할 악절도 여분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분출되는 영감들을 너저분하게 연결하는 대신, 가장 필요한 정수만 뽑아 절제와 균형으로 세밀하게 스케치하고, 남는 것은 없게 한다는 것이 그의 창작에서 항상 작용하던 굳은 신념이었다. 한 작품을 창작하면서 몇 개의 악절 조각을 남기고, 그것을 다른 작품에 멋있게 끼워넣는 일은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작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음악이라는 것이 짜맞춰 제작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디선가 모르게 와닿는 영감을 그대로 옮겨적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작곡가의 영감으로 흘러들어온 음악을 이후 다른 시간과 공간에 끌어 맞추는 것은 하나의 논리를 전혀 다른 논리에 끼워맞추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을 것이라는 것, 쇼팽은 아마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쇼팽의 독특한 템포 루바토
쇼팽의 해석에 있어서 흔히 거론되는 ‘루바토(rubato)'의 문제만 생각하더라도 그의 음악이 얼마나 세밀하게 작곡되었으며, 얼마나 철저한 균형과 절제에 의해 이뤄져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연주자로서도 마찬가지였다. 폴란드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타국의 연주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루바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루바토에 관한 한, 특히 폴란드의 무곡 마주르카(Mazurka)를 연주할 때 이방의 연주자들과는 극명하게 구별되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항상 어리둥절하게 했던 그의 루바토는 물론 민족성이 적은 음악을 연주할 때에는 보다 덜 사용되었다. 쇼팽은 루바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남용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철저히 절제되어 사용될 때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쯤은 날카로운 판단력을 가진 천재가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있는 바였다. 그는 당시 무비(無比)의 비르투오소 리스트가 자신의 작품을 대단히 탁월하게 연주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어떤 작품은 리스트가 자기보다 더 잘 연주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주르카를 연주하는 리스트에 대해서는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의 지독할 정도로 세밀한 루바토 감각때문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항상 영감이 막을 수 없이 분출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신을 잃게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열정적인 연주를 보여준다고 해도 박자, 액센트 혹은 리듬은 정확하게 구사되었다. 쇼팽의 이러한 태도는 19세기의 수많은 연주자들이 루바토를 구사한다는 명분으로 상당히 격렬하고 거친 연주를 보여준 것과는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바흐나 모짜르트, 즉 고전적인 경향이 일종의 구심점이었던 쇼팽에게 있어 감정이 앞선 나머지 형식을 흐트러뜨리며 함부로 연주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태도였다. “루바토는 필요한 부분에서 적절하게만 사용하고, 형식은 끝까지 고수한다”는 것은 연주가로서 꼭 지켜야 할 쇼팽의 철칙이었다.
쇼팽은 어렸을 때부터 엘스너 등 유명한 선생의 지도를 받았지만, 선생의 지시에 무조건 따르거나 과거 연주전통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교수법이나 교재에도 없는 독창적인 연주법을 구사하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선생도 그의 창의적인 안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쇼팽이 얼마나 개성적인 음악가였는가 하는 점을 파악한다면, 요즘의 ‘진지하지 못한’ 많은 쇼팽연주들이 얼마나 쇼팽의 실제 모습과 의도를 왜곡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