춪전세계 음각계에서 83년 초엽부터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블루스 부흥은 89년을 극점으로 하며 구체적으로 세계음악 팬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세계 대중음악의 1번지01자 블루스 음악의 본산지인 미국에서 50년대 초반부터 불어닥친 사회적 무드에 일단은 기인하는데 마약 및 폭력. 후천성 면역결핍증 AI DS 등등 한계수준을 육박할 정도의 각종 파멸적 사회일각의 움직임으로 인한 미국사회의 기본적인 정신적 모럴의 와해조짐, 바로 그것에 대한 복고 및 보수주의에 기초한다.
이후 그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연전에 '마익괴의 전쟁"을 선포하고 저명한 TIME지의 근CKR에는 많은 젊은 세대들이 여피주의에서 가족주의로 사고가 전환될 정도의 이른바 도덕 재무장운동을 발현케 했다.
그건 문화계 전반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음악적으론 디스코 시대의 말기적 상황. 그리고 Punk를 핵으로 한 일단의 New Have Music의 급진성 그외 84년부터 점화되기 시작한 Classlcal Metal Boom에 의한 속주 기타리스트들의 양산, 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거의 근거라곤 없는 것이지만 사실 종교적 의혹을 늘 받고 있는 색다른 형태의 Heavy Metal Movement 등에 대해 음악팬들은 권태 ( =염증)와 무 감동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한 환경하에서 순수한 감동게의 희구 그리고 일종의 문화적 유행의 사이클에 근거한 것0 : 바로 블루스 부흥인것이다.
이것을 반증 하는것은 많은 슷자의 Heavy Metal Musician 들에 의한 블루스적 음악편곡, 그리고 댄스 아티스트들 까지도 포함된 흑인 뮤지션들에 의한 더욱더 진지한 접근방식으로의 Rhythm & Blues의 재탐구 그외 절대로 제외할 수 없는 예로 각종 사운드 트랙과 TV 시리즈의 배경음악으로 블루스적 비중이 확충된 것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음악사적으로 블루스의 호황기 때 음악적 깊이의 면으로나 음악 저변층의 증가의 측면에서 발전이 있어 왔음이 증명되기에 필자 블루스팬의 한사람으로 흐뭇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국내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우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데 몇 안되는 우리 음악지에서 정기적으로 다룬바 있는 블루스 뮤직에 대한 분석기사의 경향 그리고 몇 군대 성업중인 유니크한 카페에서 Rock과 Jazz 그리고 Blues 음악이 전파되었고 누가 먼저인지 순서가 어떠한건지 소수의 의식있는 우리 뮤지션들에게 의해 착실히 연구가 진행되고 습작 되어져 84∼85년을 기점으로 블루스 레코드는 아니었으나 일반 대중가의 앨범 수록곡 중 소량에서 일단 작품성은 차지하고도 서서히 블루스적 실험이 행해져 왔다.
그리하여 87년에는 모음악인이 중심이 된 딩시에는 옴니버스 세션그룹 형태였던 "X X 블루스"가 데뷔앨범을 내기도 했다.
그후 분명히 그리 많은 슷자는 아니었으나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블루스적 음악의 수록빈도가 더욱더 많아져 모 TV 쇼프로그램에서는 블루스 특집쇼를 방영 하기도 하는 등 일대 활기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으나 그만 그건 중대한 문제점을 동시에 안고 있기도 한 것이었다.
음악에는 어떤 장르를 규정하는 근거로 음악의 3요소이기도한 리듬 화성. 멜로디를 특정 곡에 대해 검증하여 어떤 장르이다 "하고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 대중음악에서 블루스 운운하며 나왔던 일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음악은 사실 아직은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공식규명은 안된 답답한 상태이나 요즘 서서히 입증이 되고 있는 일본에서 들어온 전성된 소위 뽕짝곡 들이다
리듬의 측면에서는 억지로 블루스라 할 수는 있으나 화성과 멜로디의 면에서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절규가 담긴 그것과 너무나 너무나 판이하다.
다만 그들은 음악적 무드의 설정과 아주 대중적인 팝의 융합 혹은 재즈적 요소의 융합 방식으로 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나가고 있다.
먼저 이 앨범의 설명에 앞서 그를 자유 멤버들의 내면과 그 음악적 의식 그리고 경과를 추적 해본다
그룹자유는 김영진과 신대철이 작자의 그룹이 해산되자 무언가 새로운 Movement를 중심으로 새로운 음악시도를 위해서 만나게 되었다
김영진이 먼저 그룹 Blue Blood라고 이름지어 2중결성을 하여 자연스럽게 신대철과 의기 투함하여 2명의 멤버로 그룹결성에 이른다. 이후 데모테잎을 만들던 중 Audition을 통해 오경환을 영입 3인조 Band 에 이른다
그 당시 김영진도 큰 미래를 꿈꾸던 아시아나의 해체 이후 꽤 고심에 찬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둘은 동병상련의 느낌으로 의기투함, 새로운 밴드의 구상에 들어간다.
사실 둘의 음악적 성향은 굉장히 닮아있다.
예술적 록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고 블루스에 대한 애착이 그러하고 음악 인생설계에 대한 관념이 그러하다.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음악적 목표를 점한다
그리하여 확립된 것이 본 앨범의 방향이기도 한 철저히 록휠링에 근거한 블루스, 그리고 절대 그러한 것으로만 치우치지 않은 충분히 부리나라의 음악현실을 검토하여 나온 대중 까지도 안배한 파퓰러한 현대적 감각의 블루스 스타일에 기초한 슬로우 록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생각도 했다. 바로 록음악 선진국의 음악사에 대한 확고한 재확인이었다
그건 다시 말하건데 블루스를 시도 해야겠다는 결론으로 구체화된다
사실 이건 극히 지연스럽고 상식적인 발상이지만 이 논리를 한국의 음악시장에 적용하는 것은 모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본작에서 과감히 그러한 시도를 해주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현재 록필드는 경과한 시간에 비한다면 다양한 음악적 장르의 주세로 성장중이지만 대중적으로 멈밀히 현대적 록큰롤 밴드라 칭할 그룹들이 호응을 얻고 있고 물론 그들의 작업도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지만 냉정히 록의 뿌리인 블루스에 대한 근본적인 대중적 인식 없이는 록문화의 진정한 음악적 전통화는 이룰 수 없다는게 록음악 선진국에서 얻은 교훈이기에 강조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직업을 시도 한 것이다.
그들의 작업초기인 작년 10월 중순부터 레코딩에 임하기 전까지 곡을 선정하며 그들은 보컬리스트 문제로 또 한번 고충을 겪어야 했다.
사방팔방으로 물색을 했다. 그러나 들의 음악노선에 부합되는 인물을 찾기가 진정 어려웠다.
그래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