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팝음반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세련되고 자유스러운 그루브,
- 흑인 보컬리스트와 힙합 래퍼의 파워풀한 사운드
- 김민기 원곡의 <봉우리>의 재즈 펑크적이고 모던한 해석
- 팝적인 세련된 그루브의 <DON’T GIVE IN> 등 수록
Prologue
어느 때부턴가 국내에 불던 재즈의 열풍으로 많은 재원들이 그네들의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 땅을 떠났던 이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그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의 음악적 배경이 어떤 것이었든 대부분 현재는 정통에 가까운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GINA)의 등장이 더욱 반갑다. 비로소 우리는 이 여인을 통해 ‘진행형’의 재즈를 만나게 되었으므로!
지나(GINA)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건반주자 겸 작곡가다. 아니,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모함과 성실함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은 성격을 동시에 소유한 듯하다. 이화여대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면서 이렇다한 음악 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음에도 무엇엔가 홀린 듯 무작정 짐을 싸 버클리로 간 것이나, NYU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투팍이나 비기를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들에서 그녀의 무모함이 드러난다. 또 최저 등급의 앙상블 팀을 탈출하고자 매일 새벽 늦게 연습실을 지켰다는 것이나, 노력 끝에 결국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는 일화들에서 그녀의 성실함과 당참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성격들의 조합은 그녀를 금세 시대를 앞서가는 최고의 아티스트로 성장시켰다.
<Ginagram Vol.1>은 그녀의 데뷔 앨범이다. 첫 시도라고 해서 풋풋한 느낌이 묻어나는 것이 아니다. 원숙한 기량과 해석력이 이미 어느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이건 일관된 음악적인 경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 “과격한 사운드로 에너지를 내뿜고 싶다”고 하지만, 앨범은 오히려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이 앨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컨트롤할 수 있다면 이미 뮤지션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니까.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를 해줄까 / 봉우리 /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는 않았어 / 나한텐 그게 전부였거든’
“우리 세대도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며 김민기의 ‘봉우리’를 앨범에 삽입한 이유를 밝힌 지나(GINA)는 멀리 외국에서 음악적인 성과 외에도 다른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그녀의 겸손함이 여기에서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녀가 고리타분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진부한 음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큰 착각이다. 누구든 지나 서에게서 톡톡 튀는 매력을 느낄 것이며, 그녀의 음악에서는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Message From 지나(GINA)
땅 속에 머리를 박고 음악을 듣고 있는 여인이 담긴 <Ginagram Vol.1>의 커버 이미지에서 앨범에 대한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다. 커버처럼 지나(GINA)의 음악적 상상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 상상들이 음악으로 현실화된 결과도 만족스럽다. 굳이 나누자면 애시드 재즈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그녀는 이 억지스러운 분류를 무색하게 할 만큼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각 악기들은 현대적인 음색을 뿜어내고 있는데, 이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었을 때는 커버의 빛바랜 색처럼 복고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때가 많은데 이는 모두 그녀의 상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치밀함에서 나온 결과가 아닐까 한다.
앨범은 총 14트랙으로 메워져 있다. 모두 지나의 펜 끝에서 나온 곡들이다. 곡 전체의 느낌을 규정하고 있는 듯한 짧은 인트로가 지나고 2번 트랙 ‘Here We Go'가 시작된다. 강한 그루브로 드럼이 박차고 나오면 금세 베이스가 이를 받쳐주며 보컬이 시작된다. 보컬은 단순한 멜로디와 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곡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DJ의 스크래치와 몽롱한 건반, 해먼드 오르간이 또 다른 리듬 파트의 구성원이다. 지나(GINA)의 솔로는 음을 아끼면서 서서히 진행되는데, 이는 이 곡뿐 아니라 앨범 전체에서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3번 트랙 ‘There's Time'은 보컬이 가장 전면에 드러나는 곡이다. 코러스를 포함한 보컬 파트 편곡이 매우 뛰어나다. 여백이 많은 것 같지만 귀 기울이면 전체적인 사운드가 꽉 차게 다가오는데, 여기서 편곡의 치밀함이 드러난다. 그녀의 B3 연주는 곡을 절정으로 이끄는 가이드가 되고 있다.
5번 트랙은 김민기의 ‘봉우리’가 모티브가 된 곡이다. 4번 트랙은 이 곡을 위한 인트로다. 스스로 가장 애착이 가는 곡 가운데 하나로 꼽은 ‘봉우리’는 의도와 결과를 정확하게 일치시킨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헛된 인생 목표와 겸손”을 배우게 하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 상충적인 요소를 한 곡에 집어넣는 실험을 했고, 이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Awesome God'이라는 가스펠에서 영감을 받아 쓴 6번 트랙 ’Awesome G' 역시 그녀의 자식 같은 곡인데, 그녀의 독특한 연주 습관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악기의 솔로에서는 엄청난 에너지로 이 악기의 연주가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도, 자신의 솔로에서는 음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하는 절제된 느낌으로 연주한다. 그녀의 배려와 겸손을 확인할 수 있는 피아노 솔로가 일품이다.
사랑을 생각하며 썼다는 7번 ‘Blue Eyes'는 팝의 분위기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곡이다. 지나(GINA)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건조한 느낌으로 건반을 눌렀다면, 이 곡은 감성적인 터치로 곡의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스무드 재즈의 감미로운 분위기는 이내 8번 ’Don't Give In'에서 힙합 그루브로 전환된다. 랩과 보컬이 흑인음악의 끈적끈적함을 표현하고 있다면, 그녀는 다소 냉소적인 연주로 화답하며 묘한 느낌을 이끌어 낸다.
이어 실린 ‘Dreaming''이라는 곡은 전쟁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 전장의 초연함을 표현하는 듯한 뮤트 트럼펫 소리, 여러 언어가 동시에 혼란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간주, 키스 재릿의 솔로를 듣는 것 같은 그녀의 피아노 터치…. 모두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의도한 바를 달성하고 있다. 숙연함을 느낄 새도 없이 현란한 기교가 돋보이는 스크래칭이 시작된다. 10번 트랙 ’Just Like Duke'는 그녀가 가장 존경한다는, 그래서 꼭 따라잡고 싶은 대상인 조지 듀크를 그리며 쓴 곡으로,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사운드를 사이좋게 화해시키는 그녀의 재치가 돋보인다.
유일한 발라드이며, 또 유일하게 한글 가사로 노래를 한 ‘The Life Taught To Me'는 인생에서 배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풀어내고자 한 곡이다. 이어 수록된 12번 '새벽’은 적당한 비트의 리듬에 뉴 에이지 같은 연주가 덧입혀져 여명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보너스 트랙 ‘Psalm 23'에서는 작곡가 겸 가수인 윤상이 프로그래밍을 도와줬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톡톡 튀는 매력과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그녀이기에 많은 친구들과 지인이 <Ginagram Vol.1>의 탄생에 큰 도움을 줬다. 함께 프로듀싱한 윤상민씨 또한 버클리에서 주목받는 실력있는 엔지니어로서 앨범싸운드를 최고의 수준으로 높여놓은 장본인이기도하다. <긱스>의 드러머 이상민이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냈으며, 버클리 스승인 앤서니 비티(Anthony Vitty), 타이거 오코시(Tiger Okoshi)가 각각 베이스와 트럼펫을 연주했다. 버클리 동문인 마이크 페인골드(Mike Feingold)가 기타를, 마르코 파나시아(Marco Panascia)가 어쿠스틱 베이스를 연주했으며, 샘(Alto)이 알토 색소폰을 불어주었다. 래퍼 브라이언엘리스(Brian Ellis), DJ 현대(DJ hyundai), 보컬의 코리아나 루이스(Koriana Lewis)와 김형미 등도 모두 기꺼이 참여했다.
Epilogue
지나(GINA)는 곡을 쓰고 연주하고 녹음하는 과정에서 곡 하나하나에 어떤 메시지를 싣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30년간 살아오면서 느낀 삶의 일기” 같은 것이다. R&B, 소울, 힙합 같은 트렌드들을 재즈의 전통과 맞물리는 과정에 이런 메시지까지 담는 작업이 쉽지는 않은 일일 텐데도 그녀는 너무나 편안하게 ‘진화한 애시드 재즈’를 만들었다. 작,편곡, 연주, 사이드 맨들의 연주, 레코딩과 믹싱 등 앨범의 완성도도 매우 높다.
너무나 미국적이지도 않고 한국적이지도 않은 그녀의 음악은 오히려 우리네 감성에 더 맞는 듯하다. 너무나 강하지도 않고 유하지도 않은, 너무나 거칠지도 않고 섬세하지도 않은 지나(GINA)의 음악은 겸손을 가치로 여기는 그녀의 삶에서 우러나는 것일 테다. <Ginagram Vol.1>은 침체돼 있는 한국 재즈계에 어떤 도전 같은 앨범으로, 우리 재즈의 미래를 예시하는 수작임이 틀림없다.
글.. 재즈컬럼니스트 권오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