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의 나이테를 품고 있는 ‘준비된 신인’의 데뷔앨범
장효석 1집, [Another Color]
국내 음악계, 특히 인스트루멘탈 앨범의 색채가 다양해지고 폭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극심한 침체를 면치 못했던 한국 재즈계도 근 몇 년간 눈에 띄게 활기찬 기운이 감지되었다. 연주자들의 다양한 장르적 접근을 반영한 음반들이 속속들이 발매되고 있다는 점, 단순한 표절이나 모방을 벗어난 독자적인 자기 색깔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색소포니스트 장효석. 그의 이름이 낯설다면 우리나라 대중음악 뮤지션들의 음반을 몇 장만 살펴보자. 김건모에서부터 이문세, 이소라, 휘성, 거미, 린, 신승훈, 김조한, 조규찬, 불독맨션, 봄 여름 가을 겨울, 조성모, 김현철, 이승철, 이승환 등의 앨범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그의 수많은 스튜디오 세션 이력이 말해주듯 장효석은 무서운 내공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다수의 드라마 음악을 비롯해 [키스할까요?], [라이터를 켜라],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광식이 동생 광태] 등 영화음악 앨범에도 참여했던 그는 앨범 커버의 수많은 층을 가진 나이테 이미지처럼 많은 경험을 통해 단단해진 뮤지션이다.
동글동글하게 맺힌 ‘자신의 앨범에 대한 뮤지션으로서의 열망’을 10년간이나 숙성시킨 끝에 나온 그의 데뷔앨범 [Another Color]는 앨범의 탄생과정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필자로서도 감회가 남다른 음반이다. 십여 년 만에, 자신의 데뷔 앨범을 손에 쥔 이 신인 아닌 신인 뮤지션의 첫 음반을 꼼꼼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다재다능한 멀티 아티스트를 만나는 기쁨-[Another Color]
케니 지에 반해 색소폰을 시작하게 된 소년은 처음에는 피아노와 기타를 열심히 쳤었다. 트랙마다 종종 그의 베이스ㆍ펜더 로즈 솔로와 EWI, 멜로디카 연주를 만나게 되는데, 다루는 악기가 몇 개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는 실제로 클라리넷과 플룻을 비롯해 기타와 베이스, 각종 타악기들을 ‘가지고 노는’ 무서운 멀티 아티스트이다.
앨범의 문을 여는 차분한 연주곡 ‘Sad’는 마지막 트랙인 하림의 보컬곡 ‘들리지 않을 얘기’와 쌍둥이 트랙이다. ‘BPM Sax.’는 장효석의 오리지널 곡으로 미디장비를 테스트하는 중에 만들었다고 한다. 메이시오 파커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그답게 이 트랙은 본작에서 가장 펑키한 트랙으로 자글자글 끓는 그루브로 충만한 곡이다. 각각 멜로디카와 EWI로 연주된 ‘Left Foot Dance’와 ‘Teatime In Rio’는 귀에 쏙 들어오는 아기자기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곡들인데 ‘Left Foot Dance’에는 전(前) 웨이브의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최훈과 드러머 이상훈이 참여했다. ‘Tonight, I Feel Your Love’는 가장 마지막으로 녹음되어 본작에 합류한 트랙으로 트럼페터 이주한이 참여해 눈길을 끈다. 플루겔 혼의 차분한 톤과 포효하는 알토 색소폰은 묘한 대비를 이루며 중반부 이후부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데, 이어지는 트랙 ‘Daylight’과 함께 그의 열정적인 블로잉이 최대값에 이른 트랙으로 꼽고 싶다. 블루스 향취가 묻어있는 ‘Moonlight’과 가스펠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Show Me The Way’,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ㆍ선이 고운 소프라노 색소폰의 음색ㆍ하림의 보컬이 어우러진 ‘들리지 않을 얘기’로 이어지는 후반부의 보컬 곡들은 ‘고품격 대중가요’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만큼 다양한 장르적 접근을 자연스럽게 시도한 곡들이다. 게다가 깜짝 선물인 히든 트랙은 라이터와 물통 등의 소품과 테너색소폰, 베이스를 가지고 만든 것으로 그의 악동 같은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곡이다.
대중적 화법에 능숙한 탁월한 멜로디 감각
실제로 믹싱이 끝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즈음, 그로부터 그가 믹싱과정을 다시 몇 십번이나 더 반복했는지 알 수없다. 자신의 앨범에 대한 애정이야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지독하리만치 무서운 고집과 완벽주의 지향의 성격이 앨범 속의 다채로운 악기/장르/톤의 변화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게다가 본작의 다수의 트랙들을 작곡하고 키보드와 백그라운드 보컬을 비롯해 곡의 타이틀을 정할 때까지 시달린(?) 그의 절친한 동료 강화성-장효석과 함께 공동으로 프로듀싱을 맡기도 했다-의 도움도 본작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재즈는 그것이 가진 다양성만큼 수많은 악기들이 등장하고, 재즈를 듣는 사람들은 제각기 그 악기의 매력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색소폰이라는 악기가 재즈라는 음악의 매력을 가장 잘 살리는 악기 중 하나라는 데에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깊고, 낮고, 부드러운 톤의 색소폰은 오랫동안 ‘재즈의 상징’처럼 쓰였고, 또 ‘로맨틱 무드를 자아내는 악기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재즈가 어렵다’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부터 들어야할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난감해한다. 오프 비트에서 나오는 스윙감, 즉흥연주의 낯설음, 연주자의 개성이 실린 예측 불가능한 프레이징 때문에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이 불편함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장효석의 앨범 [Another Color]는 바로 그 지점에서 머뭇거리는 청자를 친절하게 이끈다. 영미권의 익숙한 퓨전재즈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특유의 멜로디 감각으로 대중적으로 다가서는 가장 상냥한 화법을 사용하면서도 중반부 이후부터는 그의 색소폰이 가진 야생성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무의식중에 내성적인 독백으로 일관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다른 국내 뮤지션들의 리더작들의 경향과 확실히 대조되는 특징이다. 빅밴드 음악에서부터 일렉트로니카 뮤직에 이르기까지, 그가 해보고 싶은 음악의 다양한 색깔을 모두 펼치게 될 이후의 다채로운 팔레트가 기대된다. 본작은 그 ‘맛보기’에 불과하다.
-박경 /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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