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숙의 코스모폴리탄-팝’
배인숙 3집 앨범은 1982년 5월30일(레코드 제조일자 기준)에 발매됐다. 아름답고 창의적인 이 앨범의 대표곡, ‘창부타령’이 첫 곡이다. 레게와 록을 오가고, 창법과 일부 가사에서는 민요를 인용한다. 전통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은 좋게 말하면 토착화에 능하고, 나쁘게 말하면 이해보단 자의적 해석을 앞세운다. 첫 인상은 이 곡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지만, 자의적이라는 말과 창의적이라는 말은 구분해 마땅하다. 전자는 문법을 무시하고 후자는 문법을 넘어선다. 1982년 5월 12일에 발행된 <동아일보>의 기사에서 배인숙은 말한다. “그동안 민요를 팝 리듬으로 부르려고 여러 번 시도해봤어요. 이번 앨범은 미국에서의 수업을 통해 익힌 서구적 리듬에 한국의 혼을 불어넣어보려는, 그 공백의 결산인 셈이죠.” 같은 기사에서 기자는 ‘창부타령’이 “뉴웨이브 록과 자메이카 레게를 결합한 곡”이라고 밝히는데, 당시 한국사회의 서구 대중음악에 대한 이해도에 비춰봤을 때 기자 스스로의 언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이 노래에는 가까운 예로 블론디(Blondie) 멀게는 스페셜스(Specials)를 비롯한 투톤 스카 밴드들 혹은 더 모스맨(Mothman) 같은 포스트 펑크밴드들이 레게를 받아들이고, 서구 대중음악으로 소화했던 것과 유사한 방법론이 보인다. 배인숙은 자신이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해 부족으로 만들어진 뜻밖의 결과가 아닌 의도였다는 것이다. 배인숙은 1978년 세종문화회관 준공과 함께 올라간 한국 최초의 전통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제4대 애랑(제1대 애랑이 패티김이었다)을 연기한 바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펄시스터즈로 열아홉 살에 데뷔해 도쿄와 미국 각지에서 언니와 함께, 76년 언니의 갑작스러운 결혼 이후에는 혼자서 고집스럽게 뉴욕에서의 음악 생활을 이어오던 그에게 고국에서 민요를 부른다는 것은 꽤나 묵직한 경험이었을 테다. 이 특별한 음악적 경험이 그에게 던진 질문이 있었고, 지난 두 앨범의 연이은 성공으로 거머쥔 음악적 주도권과 여유가 있었다.
SNL(Saturday Night Live) 하우스 밴드를 거쳐 장차 새서미스트리트(Sesame Street) 음악 크루에 합류하는 세션 키보디스트 세릴 하드윅(Cheryl Hardwick)이 앨범의 음악감독을 맡는다. 배인숙이 이전부터 추구
해온 자연스럽고 나긋한 ‘톤 앤 무드’가 댄스 음악으로 거처를 옮기고 프로듀서와 전문 세션의 손을 거쳐 더욱 간결하고 정확한 연주와 편곡으로 완성된다. 실제 3집 앨범의 음악 크레딧에 배인숙의 이름이 올라가 있기도 하지만, 보잘것없는 가수가 일류 프로듀서와 세션을 만나 짓눌리고 마는 경우는 이 앨범에 해당하지 않는다. ‘창부타령’, ‘조금만 더’, ‘님타령’, ‘그대 어디에’ 같은 창작곡에서 드러나는 서구 음악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문법에 그친다. 번안곡에서는 단연 가사에 주목하는 게 좋다. “Let’s Get Physical”을 ‘설마 잊을까’로, ‘Just The Two Of Us’를 ‘우리 둘이서’로 바꾼 가사가 감탄스럽다. 문어만큼 분명한 의미를 담으면서도 친숙한, 리듬을 해치지도 유치하지도 않은 한국어 노랫말은 쉽지 않다. 심지어 배인숙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줄곧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한 인물인데도 성공적이다. 어떤 것은 바깥에서 더 잘 보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팝 음악으로서의 한국 음악’을 분명히 하는 이 앨범은, 포스트 펑크 이래로 문법과 역량 못지않게 태도와 관점이 중요해진 동시대의 중대한 변화를 담고 있다. 또한 디스코, 소울, 록, 레게, 민요가 뒤섞인 이 앨범은, 점점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여러 장르가 하나의 작품에 융해되었던 그 시절 서구 대중음악의 흐름을, 아시아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진행된 음악사를 반영한다. 하지만 일본의 ‘시티팝’과 같으면서도 또 다른 사례인 것이, 당시 한국에는 이 앨범과 묶을 수 있는 어떤 경향도, 이 앨범의 직전과 직후를 이루는 맥락도 없었다는 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