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의 노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따지자면, 축구장 관중석 사이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를 '응원가'로 통칭하는 한국식 표현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남을 헐뜯고 조롱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우리네 선비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실 한국에서는 모든 종류의 스포츠가 펼쳐지는 경기장에서 들려오는 노래들은 대개 '우리편' 선수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그러니까 말그대로 응원(應援)만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비단 노래뿐만이 아니어서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입에서 나오는 구호란 대개 '우리팀 파이팅' 정도였고, 상대를 향한 구호 역시 그다지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타자 베이비!' 정도가 조금 심한 것이라고 해야하나. (그도저도 아닌 새로운 유형이래봤자 '우리팀'의 실망스러운 선수들, 혹은 '우리팀'에 불리한 편파판정을 내린 심판을 향해 병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 정도였다. 말인즉슨, 상대팀 선수들을 향해 격한 욕설을 퍼붓거나 과도한 조롱을 일삼는 경우는 드물었던 게 우리네 관중석 문화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유럽의 축구장에서 울려퍼지는 노래(football song, 또는 chant)를 일괄적으로 '응원가'로 번역하는 우리네 실수는 그 누구를 탓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겠다.
축구장은 오묘한 공간이다. 경기장을 절반으로 갈라 양쪽 끝에 골대를 세워둔다. 그리고 이곳에서 경쟁하는 '같은 숫자의' 선수들은 반대편 골문에 공을 집어넣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긴 채 녹색 잔디 위에 발을 올린다. 하지만 관중석은 다르다. 객석의 수가 몇 개이든 원정팀 응원단보다 많은 숫자의 홈팀 응원단이 객석을 메우는 게 일반적인 경우. 경기장 위에 오른 선수들은 공정한 기준(숫자, 장비 등)에 의해 경합하지만,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은 다른 수로 나뉘어 경합해야 한다. 하지만 당연히 폭력은 금물. 그렇다면 어디나 그렇듯 목소리 큰 무리가 제일이다. 모두가 목청을 높이기 시작한다. 목적은 두 가지. 1) 우리팀 선수들에게 그들을 응원하는 내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2) 상대팀 선수들을 응원하는 저 '극악한' 무리들의 기를 꺾고, 그들의 소리가 상대팀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당연히, 경기장에 퍼지는 구호와 노래는 '응원가'와 '위협가'로 나뉜다. 그러니 football song이나 chant를 '응원가'로 번역해 이해하는건 세계 곳곳의 축구장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최근 3~4년 동안 축구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에서도 이제 '남행열차'나 '아리랑 목동'처럼 얌전하고 예의바르게 우리팀만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적군'과 맞선 '전장'에서는 비방과 공격적 성토가 빠질 수 없다. 그러한 축구의 속성이, 축구의 인기가 확장되는 최근에 와서야 한국땅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K리그의 응원단은 상대팀 팬이나 선수단의 기를 죽이기 위한 구호를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아직 '가창 문화'와의 조합은 익숙치 않은 것인지 그러한 분위기를 담은 노래가 많이 등장하진 않았지만 이제 서서히 우리도 노래를 통해 상대를 도발하는 장면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 그것이야말로 축구장의 적대적 분위기, 그로 인해 경기의 흥분을 배가시키는 축구만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베컴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당시, 상대팀 팬들은 노래와 구호로 그의 아내인 인기가수 빅토리아 베컴을 발가벗겼다. 노래를 듣는 선수야 어쩔 수 없이 참고 경기에 집중해야 했겠지만, 그를 지지하는 팬들은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다시 그에 걸맞는 가사와 구호를 조합해 더 큰 소리로 상대에게 함성을 되돌린다. 그 틈에서 패스가 성공되고 헤딩과 스로인을 거쳐 골이 터진다. 결국, 축구는 관중석의 흐름, 그러니까 그들의 함성과 노래를 타고 진행되는 스포츠인 것이다. 하여, 노래가 빠진 축구장은 관객 없는 무대처럼 초라하고 외롭다. 축구장을 가득 메운 노래 소리는 '축구경기'라는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필수요소인 셈이다.
한국 : 오! 필승 코리아
오늘날 한국인 중에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 노래의 작곡자를 아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 [오 필승 코리아]는 유럽의 축구장에서 떠돌던 멜로디를 한국 프로축구팀 서포터스가 차용하면서 국내에 도입된 '작자 미상'의 곡을 소스로 한다. 한국에서는 프로축구팀 부천SK의 응원가로 주로 불려졌으나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국가대표팀 서포터스 '붉은악마'가 대중음악가 이근상에게 록 버전 편곡을 의뢰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가사와 제목을 얻었다. 월드컵 기간 중에는 대중가수 '윤도현 밴드'가 불러 크게 히트했다. 경기장 안이 아닌 밖, 그리고 경기 중이 아닌 그 이외의 시간에 주로 불려진다는 점에서 이제는 응원가라기 보다 대중가요로 분류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만큼 친숙해진 곡이기도 하다.
일본 : Power of Blue
아시아 축구계에서 '블루(Blue)'는 일본의 색이다. 일본대표팀의 서포터스 '울트라 닛폰'은 대표팀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푸른 색의 옷을 맞춰입고 푸른 깃발을 장쾌하게 흔들며 경기장의 스펙타클을 창조한다. 두둑한 주머니 탓인지 한국에 비하면 원정경기때 상당히 대규모의 응원단을 파견하는 이들에게 자신만의 응원가가 있다는 사실은 매우 뿌듯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곡은 '울트라 닛폰'에게는 영광스러운 기억과 함께 남아있다. 1998년 일본대표팀 공식응원가인 이 곡은 일본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오르던 때 그들 사이에서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일본이 비록 3전 전패로 탈락하면서 빛이 바래긴 했지만 오랜 염원이던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처음 불려진 자신들의 공식 응원가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곡이다.
독일 : St.Pauli Rap
독일 함부르크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 상파울리(St.Pauli)는 여러모로 독특한 팀이다. 해골과 십자가를 형상화한 로고에서부터 사창가, 빈민가 등에 인접한 경기장… 그러나 상파울리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팬들의 개성이다. 경기장에서 '신 나치즘'과 '성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갖가지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거친 음악과 펑크 복장을 차려 입고 경기장을 찾아 상파울리를 '펑크의 본거지'로 인식시켰다. 전 세계에 1천만명 이상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는 독일 한 조사기관의 발표처럼 이러한 독특한 컬러를 자신들만의 개성으로 만든 상파울리는 지난 2003년 팀이 파산 위기에 몰리자 자발적으로 티셔츠를 만들어 팔아 6주만에 무려 15만장을 팔아치운 열성팬들의 존재로 인해 더욱 각광받고 있다.
영국 : You'll Never Walk Alone
축구계에서 가장 유명한 Football Chant를 꼽으라면 단연 첫 머리에 오를 곡이다. 원곡은 뮤지컬 [회전목마]에 나오는 노래로 주인공이 죽었을 때 주인공의 아이를 임신한 여주인공을 위해 불려졌다. 뮤지컬에서 주인공의 딸이 학교를 졸업할 때 한번 더 불려지는 까닭에 미국에서는 주로 졸업식 노래로 불린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리버풀 지역 출신 그룹 'Gerry & Peacemaker'가 리메이크한 이래 리버풀 축구팀 서포터들이 관중석에서 이 곡을 합창하기 시작하면서 축구장에서 가장 널리 울려퍼지는 노래가 됐다. "너희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야"라는 가사 때문인지 전세계 여러 축구팀들의 서포터들이 애창하는 축구노래인데 그 중에서도 리버풀과 셀틱(스코틀랜드)의 서포터들은 이 노래를 거의 자신들의 대표곡으로 여긴다. 두 팀이 맞붙는 경기가 있을 때면 경기 전 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모두가 입을 맞춰 부르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 밖에 Match of the Day 테마는 30년 넘게 BBC-TV를 통해 방영되는 장수 프로그램 [Match of the Day]의 주제 음악이다. 프로축구나 대표팀 경기 등의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BBC에서 어김없이 방영되는 부정기적 방송인 이 프로그램은 '축구종가' 영국의 축구를 상징하는 TV물인데 그로 인해 이 프로그램의 주제 음악은 영국인 누구에게나 '축구'를 떠올리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이탈리아 : Aida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에 등장하는 다양한 아리아들은 이탈리아의 축구장에서 다양한 가사로 바뀌어 울려퍼지는 대표적인 축구 노래들이다. 고운 선율에 때로는 자기팀 선수들의 이름을, 때로는 상대팀 선수들의 이름을 얹어 찬사와 욕설을 번갈아 이어붙이는 이탈리아인들의 센스는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상대팀 선수/팬들의 귀를 자극한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주제가인 [ Un Estate Italiana (이탈리아의 여름)]는 지아나 나니니와 에두아르도 베나또가 함께 부른 곡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영화음악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가 작곡했다. [플래시댄스], [캣 피플], [스카페이스] 등의 영화에 음악을 지어 준 모로더는 88올림픽 공식주제가인 [손에 손 잡고(Hand in Hand)]를 작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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