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작품을 변주한 십여 장의 앨범을 비롯해 비발디, 사티, 라벨, 드뷔시, 파헬벨, 마레 그리고 헨델과 베토벤에 이르는, 클래식계의 중요인물들을 돌아가면서 집중 탐구한 앨범들을 발표한 사이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이전까지의 앨범들에서 그는 작곡가에 따른 작품을 정해 아주 기본적인 메인 테마를 빌려 왔을 뿐, 사실상 그 자신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곡들을 재창조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기존의 작품들에서는 극히 적은 부분만을 취하고 단지 ·영감·을 얻을 뿐, ·악보에 기초한 해상도 높은 재현·은 그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래의 기조가 되는 모티프의 밑그림위에 싱코페이션과 반짝이는 재즈적 상상력으로 채색하는 그를 두고 언제나 ·위대한 작품의 훼손·에 관한 논쟁이 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끄 루시에가 강조하듯이 그는 오로지 재즈 뮤지션으로서만 작품을 보고, 읽어 낼 뿐 악보에 적힌 모든 것을 그대로 연주할 의무도, 책임도 없다. 어쨌거나 본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왼손의 뉘앙스가 무척이나 중요한 녹턴의 형태적 특성상 그의 자유분방한 왼손이 절제의 문제를 놓고 무척이나 고심한 흔적이다.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되던 만화영화에서도 자주 나왔을 정도로 누구에게나 낯익은 작품 9번의 세 곡의 녹턴(녹턴 1, 2, 3번)은 크게 손대지 않았지만, 녹턴 2번은 이번 앨범에서 자끄 루시에가 취한 태도의 가장 대표적인 예를 만날 수 있는데 바로·시간차·이다. 이것은 녹턴의 필은 그대로 살려두면서도 멜로디와 엇갈려 조금 템포를 늦춘 왼손은 재즈의 향취를 잃지 않게끔 한 훌륭한 선택이라 할 만하다. 각각 G단조와 장조로 묶여진 작품 37번(녹턴 11, 12번)은 1838~39년에 만들어진 곡이다. 특히 녹턴 12번은 6살 연상의 조르주 상드와 열애 중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으로 함께 도피했던 때에 완성된 것으로 본작에서 쇼팽의 사후 발견된 녹턴 20번과 함께 가장 로맨틱한 아름다움이 도드라지는 연주로 꼽을 만 하다. 흡사 콤마촬영을 한 클레이메이션처럼 또깍또깍 소리를 내면서 끊어지는 녹턴 13번과 공격적인 타건과 절망적인 멜로디가 특징인 15번에는 우리가 익히 알던 자끄 루시에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마흔의 짧은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오직 흑과 백의 건반만을 사랑했던 시성(詩性) 충만한 작곡가. 이 내성적인 음악가가 남긴 21곡의 녹턴을 녹음했던 4일간, 자끄 루시에의 곁에는 쇼팽의 영혼이 내내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정교한 레가토와 정확한 루바토가 지켜지지 않았다고 모두 훼손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편협하지 않은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악보 속에 담겨진 곡을 연주하는 쇼팽의 피아노의 맞은편에서 변주(Variation)로 화답하는 자끄 루시에의 피아노. 앨범을 들으며 이런 광경이 그려진다면,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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