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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음악이 때로 극단적인 '초월의 미'로서 회자될 수 있는 까닭은
드라마틱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인위적인 기승전결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가시밭 위에 피어난 꽃은 가시밭의 운명을 노래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두고두고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뒤엔 분명히 감출 수 없는 가장 진솔한 '인간다움' 이 묻어나있다. 칼슘 부족으로 뼈가 골절되기 쉽고 정상 체격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선천적 골형성 부전증(osteogenesis imperfecta)'이라는 발육장애를 안고 태어난 재즈 피아니스트 미셸 페트루치아니는, 91cm에 30kg도 채 안되는 몸을 겨우 이끌고서 일생동안 수많은 뼈 골절을 당해야 했고 부러지기 쉬운 뼈로 인해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무대 위로 옮겨져야 했으며 페달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페달과 발을 연결하는 특수장치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페트루치아니의 일생에 어떠한 장애도 되지 못했을 뿐더러 수많은 팬들은 오히려 오늘까지 그를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친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기억하고 있다. 1962년 12월 프랑스 오랑주(Orange)의 이탈리아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페트루치아니는 이미 어려서부터 성장이 멈춰 정규교육도 받지 못하고 모든 것을 집에서 독학으로 배웠다.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집에서 클래식 연습용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그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면서도 3개국어에 능통하고 수학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등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음악에서는 천부적인 자질을 발휘하였다. 재즈 연주자인 기타리스트 아버지와 베이시스트 형의 영향을 받아 이미 4살 때부터 드럼을 쳤고 13세 때 처음 무대에 올라 15세 때는 케니 클라크(Kenny Clarke), 클라크 테리(Clark Terry) 등과 함께 연주하였던 그가 클래식을 떠나 재즈계에 데뷔한 것은 1979년에 파리로 이주한 뒤 1980년, 형 루이 페트루치아니(Louis Petrucciani)와 함께 데뷔앨범 [Flash]를 발표하면서였다 그가 재즈와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이나 다름없었는데 불구자였던 그에게 클래식은 멍에였기 때문이다 "학교는 내가 밖에 나가서 연주하는 것을 꺼렸어요."는 그의 말처럼 악보대로 연주할 것만을 요구하는 콘서바토리식의 음악관은 진작부터 그의 자유스런 음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자유롭지 못한 신체에서 벗어나 음악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음악관은 그가 평소에 재즈 특유의 스윙감을 일컬어 '자유의 리듬'이라고 했던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81년에는 결국 재즈의 본고장,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그를 외모만 가지고 판단했던 세간의 편견을 불식시키며 재즈계에서 확실한 인정을 받게 된다. 1997년 11월 27일. 그는 서울의 한 특급 호텔 컨벤션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내한 공연을 치렀다. 말로만 듣던 그의 연주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딱 1m 되는 키에다 양팔에 보조기를 착용한 상태의 불안한 걸음으로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페달까지 발이 닿지 못하는 터라, 페달에는 그의 짧은 다리로 작동할 수 있게 보조 막대가 설치돼 있었다. 너무나도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단 연주를 시작하자, 피아노 솔로의 극한을 보여 주었다. 스탠더드를 위주로 해 자유로운 즉흥을 구사해 가며 쇼팽과 드뷔시를 뺨치는 현란하고도 영롱한 선율을 펼쳤다. 1994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의 최고 단계인 쉬발리에를 수여 받았던 실력이 아니던가. 힘찬 타건으로 빚어내는 열정적인 리듬과 우아한 선율의 조화가 페트루치아니의 전매특허로서 그는 누구보다도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터치로 리듬을 타고 훨훨 날아다니는 듯한 미려한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지칠 줄 모르는 활력과 열정으로 연주에 임했다. 한편으로는 강렬한 건반 터치와 왼손으로 오리지날 키를 치면서 오른손으로는 반음을 올려서 치는 아트 테이텀(Arthur Tatum)의 연주 스타일을 자기 고유의 스타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더러 대부분의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간과하기 쉬운 선율의 아름다움을 그는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높은 완성도의 즉흥적인 하모니로 승화시켰다. 그의 피아니즘은 프랑스의 현대작곡가들의 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드뷔시와 라벨을 비롯한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들이 남긴 걸작들에서 자신의 음악적 자양분을 발견한 것이다 즉흥연주의 대가인 키스 자렛(Keith Jarrett)과 재즈 피아노의 쇼팽으로 불리는 서정주의자 빌 에반스(William John Evans)에게서 받은 영향은 미셀 페트루치아니의 연주인생을 지배할 정도로 지대한 것이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나의 장애로 인해 음악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음악을 사랑합니다 음악을 통해 나의 아픔을 이겨 낼 것입니다 제가 처하여 있는 아픔속에서 항상 열심히 죽는 날까지 음악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Michel Petrucciani] 죽는 날까지 음악과 함께 하고 싶었던 그의 바람 이상으로, 페트루치아니는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난 오랜 시간 이후까지 그가 창조한, 그가 연주한 불멸의 음악들과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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