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비아가 레코딩한 때는 1924년 빠리 꽁세루바뚜와르홀의 콘서트에서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뒤인 1927년이었다. 첫 음반 앞면은 소르의 '요술피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으며, 뒷장은 바흐의 '가보트'였다. 두번째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과 투리나의 '환당가요'(Fandanguillo)였다. 세고비아는 명성과 더불어 스페인 내란 다음 해인 1939년까지 수십 장의 SP판을 내놓았다. 이 음반은 1927년부터 1939년까지를 모두 수록한 '안드레스 세고비아 초기 명연집'이다. 세고비아의 SP는 하늘의 별을 따듯 구하기 힘들다. LP도 마찬가지이다. 듣다보면 그가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음악적 정기와 테크닉에 압도되어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벅차오른다.
음악평론가 김종만
<안드레스 세고비아> - 첫 레코드
김종만 (음악 평론가. 한국 음악 평론가 협의회 부회장)
19세기 말인 1893년 태어나 격동의 20세기 말 1987년 6월 3일 94살 나이로 온 세계 기타아인들과 음악인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영면한 세고비아.
그는 분명 금세기 획을 긋는 음악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카잘스(Casals), 피카소(Picaso), 로르카(Lorca). 히메네스(Jim nez)와 같이 스페인 출신의 대가로 꼽힌다.
세고비아가 활약한 20세기의 세계는 제 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큰 시련을 겪었다. 조국인 스페인 역시 내란과 복잡다난한 사회환경과 시대상으로 얼룩져 예술가들의 순수한 넋을 발휘할 환경은 커녕 강압의 스트레스로 나쁜 여건으로 눌렀다. 세고비아 또한, 조국을 16년동안 떠났지만, 결코 잊은 적이나 등진 일이 없었다. 자가당착과 저돌의 무모함 보다는, 기타아로 모든 대상을 바꾸어 치환(置換)시킴으로써 음악예술에 더욱 정진했다. 그는 강인한 의지로 끝까지 지켜보면서 진실의 승리를 기원한 현인이었다. 어두웠던 젊은 시절과 흡사한 집시.거렁뱅이.건달.돈환의 노리개였던 기타아를 세고비아는 스페인 심볼이자 세계 공통악기로 바꾸어 놓았다.
전성기인 1924년부터 1960년까지 세계 각지에서의 연주회는 3000회가 넘을 정도로 엄청났다. 끊임없고 지속적인 연주결과는 인정받지 못한 기타아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기타아를 음악의 독특한 장르에 귀속 정착시켰다. 기타아는 다른 악기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독.중.협주악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술악기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세고비아 자신도 빛나는 혜성으로 '기타아의 왕' 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얻었다. 이제 인류 역사와, 희노애락을 같이 해 온 기타아는 황금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비록 거장은 떠났지만, 그 후계자들은 이제 예전처럼 넋두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고비아의 발없는 그늘이 온 세계를 덮으며, 이 은인 덕택으로 밟은 앞날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아란훼스(Aranjuez)와 건조한 라 만차(La Mamcha)를 지나노라면, 갑자기 광활한 올리브 밭으로 뒤덮여 지는데 이 때 우리는 안다루시아의 하엔(Jaen)에 발을 들여 놓았음을 알게 된다.
세고비아가 태어난 리나레스(Linares)는 하엔에 속해 있는 시(市)이다. 그는 시청 앞 코레데라 거리 64번지에서, 1893년 2월 21일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안드레스 세고비아 토레스(Andres Segovia Tores)인데, 보통 안드레스 세고비아 또는 불어식 발음으로 앙드레 세고비아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목공(木工)으로 넉넉치 못했던 그의 부모들은, 태어난 지 2년만에 큰아버지.어머니에게 양육을 부탁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안 대신 낯설은 큰집에서 막무가내식으로 울어댔던 세고비아를 큰아버지 에두아르도는 다음과 같은 노래로 달랬다고 한다. 세고비아의 <자서전>1장 앞 머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타아를 퉁긴다는 것은
흠!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니다.
흠!
무릎에 힘을 넣고
흠!
끈기있게 해 나가야만 되는 것이다.
흠!
떼보 앞에서 그칠 때까지 노래를 되풀이 했던 큰아버지는 세고비아의 손목을 잡고 '흠','흠'하는 기타아 리듬을 흉내 내주었다. 그것은 어린 세고비아에게 매우 강한 기쁨과, 후일까지도 깊은 추억으로써 마음속 깊이 새겨준 최초의 음악씨앗이었다. 또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자라 세고비아의 인생에서 항상 좋은 열매를 거두었다고 강조했다. 10살 되던 해 세고비아는 학교입학 때문에 그라나다로 이사했다. 리나레스에서 삶을 받았다면, 세고비아 인생과 예술의 미적인 배양은 그라나다에서 였다. 중세 아랍풍의 정취가 배여있는 이 도시는 또 알함브라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목들의 잎이 살랑거리는 미풍의 소리와 나이팅게일의 고운 노래와 함께 하모니를 만들고 있었다. 더욱이 기타아는 이 도시 정취에 어울리면서 세고비아를 유혹했다. 기타아는 서민악기이면서 아름답고 소박한, 또 시적인 울림을 가졌으므로 세고비아가 여기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험난했던 독학은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선생이기도 하며 또 학생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되고 친한 전우의 우정 같았다. 그리고 그 우정의 고리는 평생 고난에 차고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통해 더욱 강해져 갔다.
"가혹한 연습에 견딜수 없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음악인이 못된다"라고 갈파한 세고비아의 말과 같이 그는 15세 때 벌써 바하에서 고전, 낭만, 근대음악에 이르기까지 능숙히 연주할 수 있는 기량을 지녔다. 드디어 1908년 그라나다 아트 센타에서 성공리에 첫 데뷔 후, 곧이어 세빌리아에서도 첫 공개 콘서트를 세고비아는 가졌다. 1912년 마드리드 연주 며칠 전 세고비아는 기타아 제작의 명공(名工) 마누엘 라미레스(Manuel Ramirez)로부터 "기타아의 영광을 주십시오"란 말과 함께 명기를 선물받았다. 이 황홀한 순간부터 더욱 더 기타아의 참된 맛을 터득해, 감미롭고 풍요한 연주를 25년간이나 했으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17년 마드리드 연주회 평을 <무지카>지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리사이틀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아직까지도 이 악기는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평가절하 상태이나, 이 비르투오소(名匠)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음으로 기타아 본래의 훌륭한 음악세계를 그려냈다. 연주회날 레퍼터리는 소르의 <요술피리 변주곡>을 비롯해 타레가, 쇼팽, 슈만, 멘델스존, 그라냐도스등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한편 저명한 문필가 리까르도 바에사 역시 "위안을 주는 감정, 풍부한 조화가 잡힌 화음, 그리고 혼을 담은 연주는 매우 만끽된 감동으로 가슴을 두드려 주었다"라고 극찬했다.
1924년에는 빠리 꽁세루바뚜와르홀에서 전고전(前古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연주를 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 연주에서 감명을 받은 루셀은 <세고비아>를 헌정했고, 그 뒤 탄스만, 토로바, 폰세, 테데스코, 빌라-로보스. 로드리고 등의 현대 작곡가들이 기타아 작곡의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마넨은 <환상곡-소나타>에서 "세고비아를 위해, 세고비아에 의한" 이라 덧붙여 적었다. 이와 같이 기타아의 정상에 오른 세고비아였지만, 제트시대에 어울리게 세계 여러나라의 연주와 대학강의와 레슨을 마치 페가수스(Pegasus)와 같이 평생 누비고 다녔다. 마스터 클래스만도 9군데였는데, 이탈리아의 키지아나 아카데미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여름학교 강습등이 유명했다. 좌우지간 세고비아는 다른 연주자들과 틀리게, 기타아를 자신이 택했으며, 기타아 예술을 인생 자체로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희망을 목표를 정해 놓았고, 이를 향해 죽을 때까지 혼신의 힘을 바친, 기타아 5000년 역사이래 최고 명장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
세고비아는 연주는 물론 레코드 녹음도 많이 해, 오늘 우리들은 수십장의 레코드 및 CD 음반으로 그의 청년기로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의 명연을 듣고 있다.
그가 제일 먼저 레코딩한 시기는 1927년에서 1939년에 이르도록 영국 H.M.V(His Master's Voice) 회사 빨강 라벨음반의 수십장들이다. 이 라벨은 그 당시 최고 일류 연주가들에게만 할애했던 음반으로 아직까지 최고 명연들로 꼽히고 있다. 세고비아가 녹음한 곡들은 1917년 마드리드 연주곡들과 1924년 빠리 연주회 레퍼터리로서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음악의 폭넓은 시대에 이르는 명곡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곡들은 청,장년기의 세고비아가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음악적 정기(精氣)와 테크닉에 압도되어 무어라 표현키 힘들 정도로 벅차오른다. 그러나 이 S.P.음반들은 축음기와 한번 쓰면 버리는 바늘 등의 번거러움과, 설령 어렵게 음반들을 구했을지라도 너무 닳고 낡아 잡음이 절반이오 음이 절반격으로 제대로 듣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이 스트링 CD와 같이 예전음반들을 모아 복각한 음반으로 내놓아 세고비아의 젊고 활동이 왕성했던 전성기 기타아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현재와 같이 좋은 음질은 아니어도 우리들이 60-70년전 세고비아를 만난다는 것만으로 기쁨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우선 이 디스크의 첫 곡으로부터 장식하는 요한 세바스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곡들을 보기로 하자.
음악의 거봉 바흐와 기타아 음악의 거봉 세고비아. 세고비아가 기타아로 입신하려고 결심했을 때, 그 레퍼토리에 넣을 기타아곡이 적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궁리 도중 그의 손에 들어온 악보는 바흐의 <류우트 모음곡> 이었다. 세고비아는 이 곡을 기타아 지판에 옮겨 편곡, 연주해 출세했다. 특히 <샤콘느>는 바이올린보다는 기타아적인 음악이라 모두가 경탄 했다.
BWV 996부터 BWV 1007까지의 류우트, 바이올린, 첼로의 기타아 편곡, 연주 특히 후가 템포의 흐름과 <첼로 모음곡 3번, BWV 1007>중 전주곡은 매우 특이한 감명을 준다. 좌우지간 바흐의 음악은 융통성이 많고 편곡하기 쉽다. 위의 <후가>도 원래는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였으나, 뒤에 류우트를 위해 바흐 자신도 편곡했다. 세고비아 역시 이러한 특성을 꿰뚫고 수많은 편곡의 연주로 출세했다.
<모자르트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서주와 변주곡, op. 9>를 작곡한 훼르난도 소르는 나폴레옹을 신봉하다 조국 스페인에서 빠리로 망명, 비참한 병마에 시달리다 눈감은 19세기 최고 거장이다. 그의 작품은 예술적인 가치나 깊이에 있어 그 무렵 어느 누구도 따를 작곡가가 없었다. 이 곡 역시 자주 연주될 뿐만 아니라, 테크닉을 발휘할 수 있는 걸작으로 꼽힌다. 곡은 <마술피리> 오페라 1막 17장에 나오는 두 테너와 베이스가 부르는 남성3부 합창의 멜로디를 주제 삼아 기타아로 편곡했다. 오페라에서 이 장면은 모노스타토스가 새잡이 파파게노를 잡으려 노예들과 노래하며 춤추다 마법의 은방울 소리에 놀래 가버리는 대목이다. 소르가 편곡한 이 곡을 볼 것 같으면 무거운 서주부와 아름다운 주제, 그리고 5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주제 원보는 G장조이나 기타아에서는 E장조로 전조시켰다. 제변주는 매우 유려한 가락과 기교를 요하는 부분이 많다. 제 2변주는 e단조로서 깊고 슬픔의 하소연같은 신음을 한다. 제3변주는 고요하고 감동력 있는 읇조림으로 노래한다. 제4변주는 높고 낮은 3잇단음 뒤 빠른 아르페지오가 매우 기교스럽다. 제 5변주와 코다(coda)는 씩씩하고 위엄 당당한 승리의 환희와도 같이 벅차게 해주는 곡이다.
세고비아는 무거운 서주부는 빼놓고, 주제부터 아름답게 연주한다. 제1변주는 다른 연주가들이 따르기 힘들 정도로 빠르며 유려한 슬러, 트릴 그리고 잽싼 스케일의 테크닉으로 매료시킨다. 곡의 흐름에 따라 간드러지는 웃음과 흐느끼는 신음을 기타아로 노래한다. 아니 기타아를 가지고 마음대로 놀며, 기타아 자체가 희노애락의 파노라마가 된다.
바로크 5 코오스 기타아 시대 거장 로베르 드 비제는 기타아 뿐만 아니라 테오르보주자, 가수, 작곡가로 유명했다. 그는 코르벳타의 으뜸가는 제자로, 루이14세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실내악단 주자로 활약했다.
그 무렵 화려했던 프랑스 궁정과 세상은 춤곡들이 풍미했던 시절이었다. 비제 역시 왕의 기타아 교사로 있으면서 많은 춤곡의 <모음집>을 출판했다. 이 디스크에 수록된 <사라방드>, <부레>, <메누엣>도 프랑스풍의 우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경묘함이 넘쳐 흐른다. <소나타>를 쓴 훼데리코 모레노 트로바는 스페인의 현대 작곡가이다. 화야(Falla)를 계승한 20세기 초반의 스페인 국민악파 후계자인 그는, 세고비아와 친하게 지내며 많은 기타아곡을 작곡, 헌정했다. 1928년 작곡한 이 곡도 세고비아에게 헌정되어 초연한 현대곡이다. 근대 기타아의 아버지인 후란시스코 타레가의 작품들은 누가 무어라 해도 명곡 중에 명곡으로 꼽힌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테마가 연상되면 이를 놓치지 않고 발전시켜 곡으로 만들겠다는 필연성이 있을 때에 한해서만 작곡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곡 하나 하나가 시인의 시와 같이 정선되었으며, 기타아의 진미를 맛볼수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은 타레가가 그라나다 교외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한 후 작곡했다. 감명 깊었던 궁전의 아름다움을 트레몰로(tremolo)곡으로 쓴 후 <알함브라 풍으로>라 이름을 붙이고 <기도, Invocation>라는 부제를 덧붙였는데 출판사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고쳤다 한다. 전, 후반 물결 흐르듯 아니 은구슬 뿌리는 듯한 트레몰로는 매혹의 이미지를 더욱 준다. 더욱이 우수적인 멜로디는 작곡자 자신이 실연의 아쉬움을 더해주는 듯한 느낌도 준다. 옥구슬 꽤듯 구르는 세고비아의 트레몰로에 강약이 대비되는 저음 아르페지오는 일품 중 일품이다. 마리오 카스텔누보 테데스코(1895-1968)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산 현대 작곡가로 세고비아와 매우 친해 50여곡이 넘는 기타아곡을 남겼다.
그는 보케리니(L. Boccherini)와 파가니니(N. Paganini)를 존경해 두 찬가(homage, Omagio)의 소나타를 썼다. 이 소나타는 1934년에 그리고 파가니니의 찬가 소나타 1935년에 작곡 헌정했고, 유명한 <기타와 협주곡 D장조>는 1939년 세고비아를 위해 헌정, 작곡했다. 생기있고 힘찬 <vivo ed energico>. 이 4악장은 빠른 1악장과 느린 안단티노의 2악장, 그리고 메누엣 템포의 3악장을 지난 휘날래의 막장이다. 빠른 아르페지오로 유연하고 빠르게 나가며 역 아르페지오에 이어 변화 무쌍한 가락과 주법과 역동적인 세고비아 테크닉으로 곡은 더욱 생동감과 벅참으로 끝을 맺는다. 이삭 알베니스(Issac Albeniz, 1860-1909)는 2곡의 <스페인 모음곡>을 피아노로 작곡했는데 <스페인 모음곡 제1번 Op. 47>이 유명하다. <그라나다>는 8곡 가운데 첫째번으로 안다루시아 산 기슭에 있는 옛 도시의 정취와 향수가 담긴 세레다데풍 소품이다. <세비야, 세빌랴>는 세째곡인데 빠른 론도 형식으로 세빌랴도시의 민속적 가락과 리듬으로 춤을 춘다. A-B-A의 B인 중간부분은 비통한 성주간의 순교를 애도하는 노래 즉 <사에타>로서 매우 비통하다. 곡은 다시 처음 A로 돌아가 리드미컬한 춤곡으로 화려하게 끝맺음 한다. 근대 국민악파인 스페인 작곡가인 알베니스는 그의 민족성과 천성적인 노래를 피아노로 아름답게 표현하였으나, 아무래도 기타아만치 스페인 내음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세고비아는 기타아로 편곡, 연주했는데 오리지널보다는 훨씬 정감이 있고 생생하며 스페인적이라, 기타아 연주로 오늘날엔 많이 연주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189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훼데리코 모레나 토로바는 국민적인 장르속에서 확고 부동한 대가의 지반을 지킨 스페인 악파의 최고 노장 작곡가로 1982년 눈을 감았다. 그는 국민적 장르인 이 기타아곡도 1920년대로부터 작곡했다. 1926년 <카스테야나 모음곡>과 <야상곡, Nocturne>을 1928년에는 소품인 <전주곡 Preludeo)을 1975년인 말년에는 기타아 협주곡 <이베리아>를 내놓았다. 그는 이 스페인적인 작품을 통해 그의 대중적이고 강한 속적인 내음을 멋지고 언제나 감미롭게 나타내주는 세련미를 보였다. <환타귀요, Fandanguillo>는 <환당고, Fandango>의 축소된 말이고, 스페인 안다루시아지방의 춤곡, 노래곡인데, 경쾌하며 리드미컬한 특징을 가졌다. <전주곡>은 단아하고 강한 그의 작곡 형식이나 감미로운 서정성이 깃들어 있다.
<야상곡>은 신음하는 듯한 밤의 적막을 시작으로부터 꿈많은 야상의 나래를 세고비아가 다양한 기법으로 수놓아 준다. 화퀸 투리나 (1882-1949)는 스페인 현대 작곡가로 세고비아에게 기타아 작품을 많이 작곡. 헌정했고, 빠리에서 댕디(d'Indy)와 같이 드뷔시와 라벨에게 작곡공부를 사사받았다. 그는 50곡이 넘는 소품에서 조국 스페인 음악의 넋을 음악적인 시로써 찾아내려고 노력한 작곡가이다. 1926년 작곡한 이 <환당기요> 역시 후라멩꼬 기타아의 라스궤아도(rasqueado) 주법과 탐보르(tambor) 주법을 사용해 성공했다. 엔리쾌 그라나도스의 생애는 알베니스와 비교할 때 너무 비참한 최후로 대조된다. 또 그의 작품은 낭만적이고 뒤뷔시 등의 인상주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스페인 국민악파 거장으로서 알베니스와 대응, 대비되는 작곡가이다. 그가 초기에 작곡. 출세한 <스페인 춤곡집>은 누가 무어라해도 걸작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12곡의 피아노곡으로 된 이 곡집가운데 <제5번, 안다루시아>는 가장 우리귀에 익숙한 유명한 곡이다. 특히 기타아 독주로 편곡된 이 5번 춤곡은 처음부터가 기타아의 리듬이고, 주제의 가락이나 장식음 주법 등은 기타아가 피아노 보다는 더 적격인 금상첨화연주라 볼 수 있겠다. 세고비아가 1939년 녹음한 이 곡을 듣노라면, 다른 어느 악기도 이와 같이 스페인 특유 정감과 운치의 음색을 낼 수 없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또 <춤곡 10번 멜랑코릭>도 효과적인 기타아의 편곡으로 더욱 돋보이게 연주한다. 두 번째 CD 첫 곡인 요한 야콥 후로베르거의 건반악기 편곡 역시 바흐 음악 편곡과 같다. 즉 건반악기를 류우트로 그리고 기타아로 편곡해도 그 특성을 잃지 않고 계승연주할 수 있다는 점을 세고비아는 강조하고 있다. 네 번째 <화려한 연습곡 A장소>는 원래 바이올리스트 사라사테 선생인 알라드<Alard>가 작곡한 바이올린 연습곡을 타레가가 기타아곡으로 편곡한 소품이다. 그러나 타레가 기법에 의해 맑고 화려한 명곡으로 부각되었다. 높은음의 아름다운 가락<멜로디>과 저음의 화려한 펼친화음을 세고비아는 멋들어진 아고긱함과 빠른 패시지로 연주한다. 다섯 번째 스페인 작곡가 화킨 말랏쯔의 <스페인풍의 세레나데>는 보통 세레나데와 틀리게 빠른 템포와 리드미컬한 특성을 지닌 곡이다. 이곡 역시 원곡은 피 노곡이었으나, 타레가가 기타아로 편곡했다. 세고비아가 연주하는 이곡을 듣고 있는동안 모방예술, 즉 편곡한 연주가 위대한 비르투오소<Virtuoso>에 의해 원곡보다 더욱 빛을 발휘한다는 점을 느끼에 함을 웬일일까?
마지막은 멕시코 태생 마누엘 마리아 폰세의 여러 작품들이다. 작은별(Estrellita)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그는, 1924년 멕시코시에서 세고비아와 상봉했다. 다양한 시정(詩情)의 기타아에 매료된 폰세는 많은 작품을 다양하게 썼으며, 한편 작곡 스타일은 인상.국민악파 작곡가로 민족적인 취향이 짙었다. 또 다른 부류의 것은 과거 대가들 즉 소르(Sor)를 찬양하기 위해 작곡한 <고전적 소나타 Sonata Clasica> 와 파가니니를 위한 <느린 변주곡>, 슈베르트를 위한 <로멘티카>, 그리고 타레가를 찬양하며 작곡한 <마즈르카>가 바로 그 찬가들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고전 모음곡> 역시 바흐시대 거장 실비우스 레오폴트 바이스(Sylvius Leopold Weiss)를 경의해 쓴 찬가다. 폰세의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이 춤곡들은, 오늘 우리를 시대에 우뚝 선 옛 거장의 아름다움을 다시 새겨준다. <스페인의 홀리아에 의한 주제와 변주후가>는 폰세 최고작으로 기타아 레퍼터리의 구약성서와 같으며, 20곡의 변주곡 가운데 세고비아는 10곡만 골라 연주, 출판했다. 홀리아는 16세기 스페인 기원의 춤곡인데, 소란스러운 춤곡이 한 세기 뒤 3박자의 경쾌하게 변했으며, 지속적인 변주의 주제를 폰세는 쓰고 있따. 음악에서는 변주와 이 가락을 <홀리아, Folia>라 부른다. <소나타 3번>은 7곡의 소나타가운데 제일 꼽히는 걸작인데,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6박자의 느린 노래형식의 2악장은 후반에 더욱 고요함을 요하며, 빠르고 치닫는 마지막 악장으로 끝낸다. <후주곡,後奏曲,Postlude>는 <화려한 변주곡>을 다시 이 제목으로 붙였으며, <작은 왈츠, Petite Valse>는 세고비아가 작곡가에게 연주할 소품을 요청하자 특별히 만든 곡이다. 이와같이 세고비아는 세계 각국의 유명한 현대 작곡가들과 상의와 설득을 시켜 많은 곡을 헌정 받았다. 그리고 베를리오즈가 갈파한 '기타아곡을 작곡하려면, 이 악기를 만져 특성과 음역 그리고 그 화음을 알아야 한다'란 높임을 물론 수 많은 명곡의 열매를 거두었다. 더욱이 세고비아는 이 주옥같은 구슬을 꿰어 휘황찬란한 기타아 예술 세계를 이룩했다. 이 2악장의 음반은 세고비아가 가장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의 곡들로 비록 일부일지언정, 기타아를 위한 젊음의 온갖 넋과 모든 정성을 다 드려 연주한 곡인지라 어느 한곡 한곡 아니 어느 한마디 마디 놓칠 수 없는 감명의 순간으로 우리들을 다시 일깨우는 정말 명반중의 명반으로 꼽으면서 듣고 또 들으며 더욱 진가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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