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밥과 모던재즈의 강박에서 한 걸음 떨어진 자유로움!
이선지의 명징한 피아노와 작곡가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3집 앨범
2011 자라섬 재즈콩쿨에서 Best Creativity상을 수상한 이선지의 명징한 피아노와 작곡가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3집 앨범 [SOAR]
스타일리스트의 완성형을 거론할 만큼 인상적인 작품.
세월이 흐르면서 더 높은 위상을 부여 받을 작품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 김현준(재즈 비평가) -
재즈 피아니스트 이선지의 3집 앨범 [SOAR]가 오디오가이에 의해 출시되었다. 이선지는 New York University에서 Jazz Study 석사과정을 졸업, 2011 자라섬 재즈콩쿨에서 Best Creativity상을 수상하며 다양한 연주와 작곡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색채를 구현해 가고 있는 연주자이다.
‘솟아오르다(SOAR)’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번 앨범은 피아노, 알토 & 테너 색소폰, 콘트라베이스, 드럼의 구성으로 하드밥과 모던재즈에 대한 강박에서 한걸음 떨어진 이선지의 자작곡이 수록되어 있다. 섬세하고 공간감 있는 사운드에서 때론 숨막히듯 공격적으로 몰아치는 다이내믹을 만들어내면서, 그 속에서도 각 멤버들간의 뚜렷한 개성을 이끌어내는 이선지의 명징한 피아노, 작곡가로서 면모 그리고 밴드 리더로서의 역량이 돋보인다.
특히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피아노와 앨토 색소폰과의 긴장된 흐름에 압도되는 타이틀곡 ‘Soar’를 중심으로, 발라드의 형식으로 여유롭게 흘러가면서도 실제로는 긴장의 끈을 풀지 않은 채 점점 더 짙은 페이소스를 떠안기는 ‘Flanerie’, 시작부터 듣는 이의 감성을 휘감아버리는 카리스마와 도약의 테마가 돋보이는 ‘Hide And Seek’ 등이 돋보인다. ‘이선지다운’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평가 받는 이번 앨범은, 동시대 재즈연주자의 진솔한 내면과 원숙한 떨림을 경험하기에 충분하다.
[라이너 노트 中]
한 피아니스트가 남긴 특별한 소요(逍遙)의 기록
김 현 준 (재즈비평가,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 월간 재즈피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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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언급한 ‘수면 밑의 심상찮은 움직임’은 앨범의 첫 곡인 ‘Brooklyn In The Morning’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인상주의적인 시선으로 관찰했을 때 작품 전체에 드리운 계절이나 시간의 이미지는 특정한 어느 것이 아닌 변화의 시기에 해당한다. 예컨대, 지나버린 겨울이나 간밤의 정서에 새로이 다가오는 봄과 여명의 정황이 뒤섞인 듯한 곡의 테마는 아련하고도 풋풋하게 다가온다. 두 명의 앨토 색소포니스트가 빈틈없이 이어가는 앙상블은 4년 전의 이선지가 선보였던 기조와는 다른, 관조의 면모를 드러낸다. 당시의 그녀라면 한결 복잡하게 얽힌 편곡을 통해 의식적으로 진취적인 성향을 선보이려 애썼을 것이다. 이 변화는 [Soar]를 감상하기 위한 또 하나의 핵심축이기도 하다.
‘소요(逍遙)’라는 의미의 ‘Flanerie’는, 첫 곡에서 제시된 이미지 중 하나의 단면을 좀 더 강조한다. 이 곡의 정서는, 반드시 지워버리고 싶건만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는 ‘미련’이라 하겠다. 그 때문인지, 외견상 발라드의 형식으로 여유롭게 흘러가면서도 실제로는 긴장의 끈을 풀지 않은 채 점점 더 짙은 페이소스를 떠안긴다. 후반부에 다시 등장해 힘을 보태는 앨토 색소폰의 메인 테마와, 솔로에서 펼쳤던 감성을 그대로 확장해 ‘미련의 뒷모습’까지 겹쳐 그려낸 피아노의 흐름은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앨범 전체의 구성상 매우 큰 역할을 했다.
‘Flanerie’의 가슴 저림은 이내 ‘Soar’를 통해 역동의 이미지로 승화한다. 더 이상 과거에 묻혀 있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적인 정서가 느껴지는 이 곡은 앨범의 전반부를 관통하는 긴장감의 핵이다. 시각에 따라 다른 감상도 가능하겠지만, ‘Soar’의 포인트는 역시 피아노다. 매력적인 테마에 이어 두 앨토 색소폰 연주자가 솔로를 이어갈 때, 이선지는 상투적인 콤핑을 피한 채 각각 다른 스타일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신의 솔로가 시작되는 순간, 매우 짜릿한 장면을 연출해낸다. 앞선 관악기 연주자들이 곡의 진행을 보좌하는 스타일의 솔로를 시도했다면, 이선지는 그 모든 진행을 포괄한 채 한 사람의 솔로이스트이자 작품 전체를 관장하는 리더로서, 조율자의 역할까지 훌륭히 수행해냈다. 10분에 가까운 곡이지만 짧게 느껴지는 것도 이처럼 다이내믹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전개해낸 덕분이다.
‘Soar’가 적잖은 무게감으로 듣는 이를 압도한다면, 피아노 트리오로 연주된 ‘February Song’은 앨범의 첫 두 곡에서 드러난 정서를 다시 한 번 연출한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이 감성의 흐름이 결코 동어반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앨범 전체에서 꽤 강렬한, 그러나 노골적이지 않은 관능미를 감지했는데, 지금 거론한 ‘February Song’과 마지막 곡인 ‘Hide And Seek’가 특히 그랬다. 사실 이러한 인상은 2008년에 발표된 이선지의 첫 앨범에서도 유사하게 관찰된 바 있다. 당시 나는 라이너노트를 통해 그녀의 곡들이 “은근하고도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다고 썼는데, 고백컨대 4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나 스스로 내가 택했던 그 표현의 진의를 올곧게 파악한 셈이다. 물론 그 세월 속에서 이선지는 필요악인 시행착오를 적잖이 거쳤으며, 애초부터 지녔던 자신의 강점을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스타일로 안착시켰다. 해낼 수 있는, 그리고 해내야 하는 것을 명확히 인지했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허비 행콕(Herbie Hancock) 원작의 ‘Dolphin Dance’가 매우 유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처음 이선지가 녹음 레퍼토리에 이 곡을 포함시켰을 땐 그 자체가 일말의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앨범을 반복해 들으면서 이젠 굳이 원작자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아도 감상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역설적으로, 이 명곡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원곡에선 많이 엿보이지 않던 가볍고 시니컬한 타건에, 쿼텟 편성의 멤버들이 한결 더 꽉 조여진 느낌의 박진감을 연출하는 것도 재해석 차원에서 짚을 부분이 아니다. 되레 [Soar]의 연주를 맡은 이들이 하나의 시선으로 무장한 채 탄탄한 조화를 엮어내고 있다는 심증의 근거로 작용한다.
드럼의 깔끔한 터치로 마무리된 ‘Dolphin Dance’에 이어, ‘Deep’의 테마와 뉘앙스는 상대적으로 다른 곡들에 비해 명료하게 들린다. 구성이나 솔로 모두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경우라 하겠는데, 아마 녹음 전에 미리 조율이 됐던 듯, 연주자들은 개인의 속내를 일정 부분 감춘 채 한결 냉정한 태도로 그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곡을 마친다. 이 정도의 쿨한 연주라면 분명 다른 역할을 생각할 수도 있는 바, 이 곡을 마주하며 다시금 깨달았던 것은 하나의 앨범을 조합하는 곡 구성의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부분이었다. 말인즉슨, 끝 곡인 ‘Hide And Seek’의 도입부가 울려 퍼지는 순간 비로소 ‘Deep’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정돈되더라는 얘기다.
다른 가치를 모두 제쳐둔 채 작곡의 성과만 가지고 말한다면, ‘Hide And Seek’는 앨범의 타이틀이 될 수도 있었을 만큼 매혹적인 곡이다. 시작부터 듣는 이의 감성을 휘감아버리는 카리스마가 그렇고, 연주자로 하여금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도약의 테마가 그러하며, 미세한 두께로 형성돼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끊어지지 않을 듯한 감성의 실마리가 또한 그러하다. 먼저 아이디어를 제공한 피아노에 이어 곡의 성과를 한 단계 더 높인 앨토 색소폰 솔로는 앨범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다. 여운을 남기며 하나씩 사라지는 악기들을 뒤로 한 채, 이선지의 피아노가 홀로 남아 의미심장한 울림을 전한다. 바로 그 대목의 왼손이 앨범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설레지만 셀렌다고 얘기하지 않는, 그러나 차분히 앉아 지켜보면 눅인 숨결을 통해 여지없이 전해지는 ‘원숙한 떨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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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석에서 이선지는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한 바 있다. 그녀는 “다른 후배들처럼 강렬하고 빠른 타건을 갖지 못했다.” 겸연쩍지만, 임의대로 여기에 또 하나의 약점 아닌 약점을 덧붙인다. 이선지는 ‘재즈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의 관심까지 이끌어낼 만큼 감각적이거나 대중적인 멜로디 라인을 구축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난제들은 역설적으로 이선지의 음악성을 완성시킨 원동력이다. 무릇 재즈는,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 존재하지도, 귀를 간질이기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다. 물론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 자체가 창작의 의도이자 목표일 수는 없다. 지난 수년 간 이선지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만의 감성과 시선을 가감 없이,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면 모든 갈등의 요인들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Soar]는, 이선지로 하여금 이 오랜 숙제를 비로소 떨쳐버리게 한, 더없이 뜻 깊은 성과물이다. 이보다 더 큰 박수를 보낼 일이 있을까. 특정한 관념이나 트렌드를 대변하지 않고, 오로지 창작자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투영해낸 재즈는 접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 아쉬움이 불안함으로 심화돼 가는 이즈음, [Soar]를 만났다. 들으면 들을수록 피부 아래 감춰져 있던 여러 이야기가 새록새록 존재를 알리며 꿋꿋하게 돋아난다. 마주 앉아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 공감의 감흥에 이내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이건 그녀의 삶이지만, 우리의, 나의 삶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 높은 위상을 부여받을 작품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게, [Soar]의 힘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