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가요 명반 1위의 아티스트 장필순의 11년만의 귀환작인 7집 [Soony Seven]
도시의 오후, 숲의 새벽이 되다
장필순7집 Soony 7
온 도시의 거리를 붉은 티셔츠의 무리들이 가득 메우던, 소란스럽고 뜨겁던 그 해,
더할 수 없이 메마른 장필순의 6집이 조용히 세상에 던져졌다.
귀 밝은 소수의 사람들이 찬사를 퍼부었던 명작이었지만 세상은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십년이 넘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장필순, 조동익을 비롯한 그 무리들은 서울을 떠나 제주에 은거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들의 음반을 아껴듣던 이들은 아마 저마다의 바쁜 삶으로 휘말려 들어갔을게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비범하지만 너무나 메말랐던, 도시적인 감성안에 나른함과 온기마저 전자음으로 기화되었던 순간이었다.
손 뻗으면 바스라져 사라질 것 같던, 신기루 같던 그 소리들 속에 어떤 쓸쓸함이 있었던가.
‘푸른곰팡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다시 모였다는 소문,
간간히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른다는 소식이 이어지기 시작하던 최근,
아마도 많은 이들은, 드러내놓고, 혹은 은근히, 기다렸을 것이다.
장필순의 새 앨범, 그리고 숲으로 사라졌던 조동익의 귀환소식을.
그렇다. 그렇게, 드디어… 돌아왔다.
그간의 시간이, 그리고 제주라는 새로운 삶의 공간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긴 말 필요 없이 정적 속에 울려퍼지는 ‘눈부신 세상’의 경건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조동진 5집에, 역시 조동익의 편곡으로 실렸던 이 곡은
원곡의 영적인 느낌은 가져오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옷을 입었다.
깊은 고요속에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단 하나의 피아노 건반 소리,
차가운 대기와 어둠을 가르며 서서히 밝아 오는 새벽처럼 앨범의 포문을 연다.
이 남다른 공간속에 문득 폭포처럼 쏟아지는 보이스에 정신이 번쩍 든다.
지난 앨범이 도시 오후, 낮잠 속에 스며드는 고독과 나른함이었다면,
이번 앨범은 숲 속에서 맞는 새벽의 독백이다.
이 새벽은 깊은 밤을 가로질러 맞이하는 도시인의 새벽이 아니라,
해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농부의 부지런한 새벽이다.
우울한 현실속에서도 제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두 발 힘껏 힘주어 솟아오르"는(무중력) 힘이 있다.
새벽은 슬픔과 우울을 외면하지 않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다.
"흔들리던 너의 어제를 부끄러워 하진마 / 그대로의 너의 모습을 다시 사랑할 순 없는지"
(너에게 하고싶었던 얘기)라며 가만히 어깨를 내어준다.
어느 덧 조용한 위로는 점점 고조되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너"를 외친다.
그 극적인 고조가 주는 기운을 그대로 전하려는 듯 힘있는 위로다.
조동익이 장필순과 함께 만든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은
그들이 숲으로 돌아가 얻은 가치를 조용히 되새긴다.
전작에서 시계와 찻잔, 베개와 기타에게 고백을 하던(6집 "고백") 그는 이제
젖은 바람과 빗방울, 달빛과 새벽 안개가 던지는 침묵의 질문을 듣는다.
"늘 살아 있기를 / 늘 깨어 있기를 /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바래는 답이 그 뒤를 잇는다.
담담한 독백이 춤을 추듯 원을 그리는, 아름다운 숲의 노래다.
하지만 이 세계 속에서,
여전히 비천한 일상에 메인 도시 생활자들과 동떨어진, 목가적인 평화와 고립감을 예상하진 말아야 한다.
그녀의 세계는 조금 더 빛에 가까워졌으나
여전히 오늘의 정적과 어제의 소란은 충돌하고 기억과 꿈은 아름답게 뒤엉켜 있다.
[1동 303호]는 하나음악 시절 [바다] 음반에서 선보인 바 있었던 조동익의 [탈출]과 맞닿아 있다.
아파트의 소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매일 시도하는 작은 탈출,
그리고 경비 아저씨의 친절에 새삼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세계는 소음과 정제된 화음이 교차하며, 우리의 일상과 고립되지 않은 공간에 자리한다.
이규호의 곡에서는 조동익과는 또 다른, 독창적인 시청각의 세계가 열린다.
전면에 향수 어린 건반과 현의 소리가, 후면에 기계소리가 지직거리는, 신비로운 곡 [맴맴]은 늦여름 매미 소리에 소환되는 기억을 되새긴다.
“깜박 졸다 다시 졸다 매미들 합창소리"에 “십분의 시간 몇 년 거슬러”가며
“기억의 방 창문으로 흘러"가는 여정은 홍차에 적신 과자맛을 따라 긴 이야기를 시작한 소설가의 여정처럼, ‘순간’에 ‘영원’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휘어진 길]에서는 조동익의 아들 조민구의 랩이 “추억"과 “텅 빈 가슴"을 읊조리며 생경하지 않게 어울린다.
전혀 다른 색깔의 음악임에도 어른들의 음악은 늙지 않았고 젊음의 음악은 과시하지 않는다.
음반의 마지막은 고찬용이 쓴 [난 항상 혼자 있어요]가 마무리한다.
숲에서도 밤이 찾아온다면, 그리고 여전히 혼자 있다면 이런 혼잣말을 하게 될 것이다.
외로움도 슬픔도 잊혀지겠지만, “가슴을 울렸던 얘기, 그들과 나눴던 웃음"은 남는다.
“이 슬픔은 모두 잊혀지겠죠” 나즈막히 뱉는 탄식은 그래서 이전처럼 바스라질 것 같은 불안감이 아닌, 그저 늦은 밤 차 한 잔의 일상적인 독백을 담고 있다.
시간의 흐름, 유행의 흐름과 무관한 것 같은,
이 여전하면서도 새로운 앨범에는 가까운 동료와 후배들의 조력도 빼놓을 수 없이 빛난다.
지난 앨범에서 조동익과 함께 윤영배가 음악적 색깔을 만드는데 큰 기둥 역할을 했다면
이번 앨범은 박용준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무중력]이라는 세련된 곡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편곡과 프로듀싱 역할을 조동익과 나누고 있다.
함춘호와 신석철은 레코딩과 공연장 어디서나 함께하며 빈틈 없고 다양한 톤의 연주를 선보였다.
눈 밝은 옛 팬들이라면 발견했을 엔지니어 이종학은
하나음악 시절부터 오랜 시간 함께하며 그녀의 세계를 마무리한다.
이 오랜 동료들은 작곡, 연주, 녹음의 전 과정을 일관된 색으로 꿰고 다듬어
그들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지탱하는 힘이 된다.
숲에는 습기와 온기가 좀 더 많이 돌고 있다.
야생의 날카로움, 고독과 정적의 세계는 홀로 떠돌지 않고
매일의 밥과 노동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새벽은, 그리고 밤은, 여전히 아름답고, 전보다 더 따뜻하다.
2013년 늦은여름 -기린그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