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더듬는 독한 가시의 유혹
10년 넘게 부산 록 음악씬을 묵묵히 지켜온 언체인드(Unchained) 첫 번째 정규앨범 [가시]
고된 하루에 지쳐 버린 몸을 이끌고 좁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순간,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구원의 손길 조차 바랄 수 없는 적막함 속에서 영혼 없는 위로에 드리운 고독과 쓸쓸함이 엄습하며 다가올 때,
그저 가만히 당신의 폐부를 찌르는 독한 가시의 노래. 언체인드 [가시].
데뷔 이래, 무려 13년만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을 내는 밴드가 있다. 그들이 음악 활동을 중단하거나, 재결성 같은 수순을 밟지 않았음에도 세월의 강산은 한 번 이상 변했다.
게다가 음악을 하기 위해, 보다 나은 기회를 꿈꾸며 서울 홍대 앞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밴드 틈 사이에서 부산 록 음악씬의 명맥을 터줏대감처럼 우직하게 지켜왔다.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그 길을 뒤로 한 채, 가장 편하게 음악에 전념할 수 있는 지역 환경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이루고자 했다.
그래서 부산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과 뜻을 모아 2005년에 진저 레코드(Ginger Records)를 설립하고, 로컬 밴드들의 앨범 제작 및 기획을 총괄하면서 동반 성장을 도모했다.
이렇게 언체인드는 절대 서두르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증명할 때까지 작은 발걸음을 이어갔다.
평소 존경하는 '윤병주(로다운30, 노이즈가든)'의 조언을 받으며, 언체인드 멤버들이 직접 레코딩, 믹싱, 마스터링에 이르기까지 다년간 고민의 땀방울이 배인 첫 번째 정규 앨범 [가시]를 느지막이 발표한다.
언체인드는 밴드 이름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나듯, 1990년대 초반 미국 시애틀에서 주로 활동했던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 사운드가든(Soundgarden), 펄잼(Pearl Jam) 같은 그런지(Grunge)에 근간하고 있다.
특히, 메탈과도 같은 묵직한 기타 리프에 더해진 사이키델릭 요소를 보면 앨리스 인 체인스와 노이즈가든(Noizegarden)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에 자체 제작하여 발매한 첫 EP [Push Me] 는 거침없는 질주감을 살림과 동시에 서정성도 겸비한 얼터너티브 록 앨범이었다.
당시 국내 밴드 중 그만큼 그런지를 제대로 구현한 음악은 없었던 터라 마니아층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그로부터 9년이 흘러 [가시]에는 영광스럽던 시절의 충실한 재현이 아닌, 언체인드만이 할 수 있는 더욱 짙고 깊어진 록의 정수가 담겨있다.
강력하게 휘몰아치기는 것은 여전하지만, 사이키델릭과 블루스의 질감을 보다 살리면서 곡을 다채롭게 구성했다.
단단하게 받혀주는 리듬 섹션 위로, 기타는 마음껏 휘젓다가도 끈끈하게 조이는 리프로 연결된다.
그리고 슬로우 템포의 곡에선 한층 더 옭아매며, 내면의 분노를 표출한다. 여기에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녹아든 보컬의 목소리와 가사가 호소력을 더해주고 있다.
정규 앨범 [가시]의 전반적인 컨셉트는 앞서 발표한 디지털 싱글 '호저'에 상당부분 함축되어 있다.
이 곡은 2012년에 네이버 온스테이지 영상으로 처음으로 공개되었는데, 촬영 당시만 하더라도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초기 의도는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인간관계를 고슴도치 형상을 빌어 노래했다.
그런데 우연히 고슴도치와 유사한 동물인 '호저(산미치광이 / 豪猪 / Porcupine)' 를 알게 되었고,
여기에서 착안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호저의 딜레마 (Porcupine's Dilemma)'로 명쾌한 영감을 얻게 된 것이다.
온 몸을 뒤덮은 가시 때문에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찾는 과정은,
마치 끊임없는 상처로 관계의 거리를 탐색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뜻한다.
즉, 호저의 가시(Thorn)는 내 자신의 허상과 가식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청자의 다양하고 열린 해석이 가능하도록
앨범 자켓디자인 역시 다양한 인간관계의 양면성을, 타오르는 듯 붉게 물든 호저의 가시와 잿더미 등으로 형상화 해 놓았다.
'호저' 외에 다른 노래들도 이처럼 수 많은 '가시'의 퍼즐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가사 곳곳에 담긴 '너'와 '나'는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형상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유연하게 생각하자면, 내 옆의 반려동물이기도 하고, 거부할 수 없는 담배 한 개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가식적 인간 군상처럼 마주하기 싫은 존재이거나, 절정에 이른 섹스를 그려내기도 한다.
'무엇이 참된 진실이고 거짓일 수도 있는 진실인가?' 이렇게 혼란스런 관계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허물만 남겨진 부패한 정치와 종교에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일부에 대한 해석을 돕자면, 'Siren'은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유혹에 대한 이야기이고, '암'과 '파리'는 각각 암적인 존재와 (똥)파리 같은 인간들을 빗댄 것이다.
'Stop'은 아찔했던 순간과 사건에 시간을 멈추고 처음으로 리셋하고픈 마음을 담았고, '고백'은 사회가 사람들에게 무언으로 강요하는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친절하고 자상한 모습'을 꼬집어 본다.
이렇게 언체인드 [가시]를 가만히 주의 깊게 들여다 보며 서서히 취하는 순간, 내 자신 속에 숨겨진 퍼즐의 조각을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언체인드의 음악은 우리를 둘러싼 관계와 내면의 갈등을 묘사하면서 점점 어둠 속으로 향한다.
그것은 마치 '다 함께' 신나게 즐기는 페스티벌 보다 '홀로' 외롭게 분리되고 남겨질 때, 호저의 가시가 폐부를 깊숙하게 파고들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고된 하루에 지쳐 버린 몸을 이끌고 좁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순간,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구원의 손길 조차 바랄 수 없는 적막함 속에서 영혼 없는 위로에 드리운 고독과 쓸쓸함이 엄습하며 다가올 때,
거짓으로 점철된 사회에 맞서 버거운 몸부림이 시작되면, 언체인드라는 독한 가시가 피어나며 날카롭게 파고든다.
언체인드에 중독된 단 한 사람 위해서라도, 골목길 어둠에 드리운 그 고독과 그 희열을 느낄 수 있다면, [가시]는 내 안의 밤을 계속 노래할 것이다.
"밤이 다시 나를 부르고 / 저 달이 가만히 나를 비추고 있네 / 그게 바로 나였기에 너를 벗어날 수 없기에 / 너의 그 깊은 어둠 속에 나를 던지고 말아" - '밤을 부르다' 중에서
-홍상균(온스테이지 기획위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