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미래를 바라보다
한국 일렉트로닉의 교과서, 캐스커 이준오의 솔로 프로젝트 ‘JUUNO’가 만들어내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한 사운드의 세계 [Shift]
‘한국 일렉트로닉의 교과서’, ‘캐스커라는 또 다른 장르’, ‘심장을 가진 기계 음악’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가진 그룹 캐스커. 그 중심에 서 있는 이준오가 ‘JUUNO’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담은 솔로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이번 앨범은 이준오가 선보여 온 그 어떤 작업물보다 가장 일렉트로닉스러운 결과물들이 담겨 있다.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영화 ‘더 테러 라이브’. 지난 해 여름 극장가의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는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만큼이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사운드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준오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만들어낸 이 사운드들은 기존의 캐스커 음악과는 사뭇 다른, 날선 전자음과 비트들 간의 싸움에서 얻어진 결과물들이었다. 컴퓨터 앞에서만 보낸 약 1년, 그는 소리와 보이지 않는 싸움을 거치면서 자신의 음악적 시작점인 ‘일렉트로닉 뮤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Shift]는 그러한 되새김의 결과 탄생한, 가장 이준오다운 정체성이 담긴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캐스커의 음악이 어쿠스틱 기타나 피아노가 첨가된, 조금 더 오픈된 형식의 전자음악이라고 한다면 이번 앨범은 전적으로 시퀀서와 프로그래밍 테크놀로지로 만들어진 ‘정통 일렉트로닉 뮤직’이다. 영화의 제작 기간 동안 틈틈이 작업해 둔 시퀀스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번 앨범에는 캐스커의 음악들보다 조금 더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수록곡들이 담겨 있다. 이번 앨범을 위해 곡의 제작부터 믹스까지 캐스커의 초기작인 1집 ‘철갑혹성’ 때처럼 모두 작업실에서 홀로 진행했으며, 마스터링 과정에서는 음의 명료도와 공기감에 집중했다. 또한 왜곡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음압을 얻기 위해 매우 긴 시간을 들여 작업을 진행했다.
이번 앨범은 재료가 되는 모든 사운드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 하나 모두 JUUNO가 직접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사람의 손이 많이 닿은, 가장 인간적인 작업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차갑고 인위적이라고만 여겨지는 전자음악에 대한 선입견은 잠시 접어두고, 하나하나의 음에 숨겨져 있는 JUUNO의 손길과 감수성에 귀를 기울여보기를. 또한 융진이라는 여성 보컬이 메인인 캐스커와 달리, 이번 앨범에는 남자의 관점에서 쓰인 노랫말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캐스커의 팬이라면 신선함을, 이준오의 음악적 매니아라면 노랫말에서 느껴지는 그만의 색다른 감수성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JUUNO가 직접 전해 온 곡들의 작업기를 통해 조금 더 자세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Track Comments from JUUNO
01. Floater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 같은 느낌을 담은 곡이다. 떠다니는 신시사이저와 보컬샘플을 인위적으로 가공해서 멜로디를 만들었고 전체적으로 소리들이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특정한 파형을 가지고 모든 소리를 구축한다’ 라는 발상에서 착안했다.
02. 시간을 믿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시간이 흐르며 무디어지는 척하는 사람'에 대한 짧은 글을 쓰고 그 글을 음악으로 옮겼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결국은 더 깊어진 슬픔에 대한 텍스트는 담담하게 말하는 듯 나열했고, 이 기계음들 위에 소리를 입히는 과정에서는 90년대나 00년대 초반 전자음악의 느낌을 내기 위해 그 당시 좋아하던 장르와 소리의 질감들을 구현하고자 했다.
03. 거절
'상대의 마음을 거절한다'는 것이 상대방이 느끼는 것처럼 매몰차고 가혹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거절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곡이 많았다면 이 곡은 담담하게 거절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기본적으로 단순한 드럼 위에 분절되는 리듬의 조각들을 넣고 올드한 느낌의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들을 담았다. 보컬로는 파스텔뮤직의 신인 뮤지션인 Azin을 기용했는데, 곡의 분위기에 맞추어 때로는 꿈꾸듯이, 때로는 쓸쓸하게 느껴지도록 목소리의 톤을 주문했다.
04. Poly Evil
기본적으로는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로가 서로를 원하지만 반대로는 다른 이를 밀어내는 어긋난 관계에 관한 노래이고 각자에게 사랑이자 원망이기도 한 심리상태를 다중악, ‘Poly Evil’이라는 합성어로 만들어 표현해 보았다. 4비트의 하우스곡은 그전에도 종종 만들었지만 최근에 유행하는 형태와는 다르게 가고 싶어서 복고적인 느낌의 진행과 사운드에 IDM적인 요소를 혼합해보았다. 노래하는 사람 역시 다중적인 캐릭터를 드러내야 하므로 짙은의 성용욱군에게 '중성적인 느낌'을 요구했고 그 특유의 보이스가 곡과 잘 어울려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05. 후일담
음악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손에 넣었던 신시사이저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오래된 낡은 기타'만큼이나 나에게 각별한 추억과 이야기들을 불러일으켜주는 오랜 친구다. 16년전에 산 nordlead1이라는 구형모델이 이 곡의 메인 악기이고 이 곡을 끝까지 이끌어가 주는 모티브였다. 가사의 내용은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혹은 모든 것이 지나간 척 한 후의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것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넌지시 생각해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