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동 단편선 [백년]
화제의 데모 [스무살 도시의 밤(2007)] 이후
5년 만에 발표된 첫 번째 정규음반 [백년]
회기동 단편선의 첫 정규앨범 은 한껏 욕심을 부린 앨범이다. 짐짓 “조용한 포크”인양 시작하는 첫 트랙 부터 일렉트릭 기타와 격렬한 샤우트로 낙차 큰 반전을 만들고, 풀밴드에 필드레코딩, 일렉트로닉스, 노이즈 등을 활용한 트랙들이 넘쳐난다. 세션 목록은 꿈에 카메라를 가져올걸, 노 리스펙트 포 뷰티, 404, 악어들, 스클라벤탄츠, 퍼스트에이드 등으로 슈게이징이나 포스트록, 노이즈와 일렉트로니카에 이르고 있어, 이 앨범이 흔히 생각하는 포크 음악에서 꽤나 멀리 나가고 있음을 바로 짐작케 해준다.
포크와 포크 아님의 경계를 넘어 가장 멀리까지
보컬은 디스토션이나 딜레이 등의 이펙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뿐더러, 찜찜할 정도로 나지막하거나 위악적일 정도로 가녀리다가도 괴로울 정도로 우수꽝스럽거나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때로는 구성지고 때로는 무덤덤한 목소리를 오가는 등 창법도 변화무쌍하다.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의 폭력적인 긴장을 쌓아가는 처럼, 앨범 전체의 편곡과 연주는 매우 연극적이고 다이내믹하다. 의 기타가 가슴 먹먹한 사운드로 때로는 보컬을 압도하기까지 하는 것은, 이 앨범이 풍성한 표현을 위해 믹스까지 과감하게 이용되는 총력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편선은, 이 앨범에서 어쩌면 가장 인상적일 수 있을 을 깔끔하고 화려하게 녹음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활동가이자 음악가인 회기동 단편선의 곡들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현장을 거치며 벼려진 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침이 튈 듯이 가깝게 느껴지는 보컬과 기타 한 대만으로 이뤄진 편곡과 녹음은, 현장의 생명력을 곡 안으로 그대로 가져다 놓는다. 이 점은 역설적으로 이, 단순히 최대한 많은 것을 쏟아붓기만 하는 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연극적으로 펼쳐지는 삶 속의 이야기들
라이브 연주자로서의 단편선은, 포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이야기를 전달”함에 있어 연극적인 효과를 많이 활용하는 음악가이다. 앨범에서도 여러가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 느껴진다. 각각의 곡은 풍성하게 갖춰진 음악 언어의 보캐뷸러리에서 섬세하게 고른 어휘들로 연출되었다. 또한 곡들이 모인 집합체로서의 앨범은, 과거와 절망을 노래하는 전반부에서 점차 희망과 미래를 노래하는 후반부로 흐르도록 구성되었다.
이것은 이 앨범이, 우리의 삶과 서서히 작별을 고하고 있는 앨범 포맷에 대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 그것은 요컨대, 현장의 라이브로 활동하는 음악가가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프로듀스하여 앨범을 만든다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하는가,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깊이 있게 숙성된 풍성한 음악적 결
너무나 리얼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세상(), 잔혹한 현실과 서글프게 비루한 일상의 교차(), 어쩔 수 없는 나약함과 아픔 속에서도 앞으로 향하고자 하는 희망(, ) 등, 단편선은 시종일관 은근하고 애매모호하게 남는 은유들로 자신의 삶을 노래한다. 수록곡 중 가장 오래전에 쓰여진 것은 2007년의 으로, 이 앨범은 길게는 4년 반에 걸쳐 쓰여진 곡들을 담고 있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공연들을 거치며 조금씩 변화하고 숙성되어 온 곡들이다. 그리고 그는 이 곡들을 소재로 하여, 레코딩의 형태가 아니면 만들어내기 힘든 지점까지 도달하기 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보다 다층적으로 펼쳐진 음악적 텍스트의 깊이다.
단편선 자신의 생활 자체에도 제법 지장을 줄 만큼의 시간과 비용을 들인 끝에 텀블벅 tumblbug.com 후원을 통해 끝내 완성된 앨범이다. 자기 음반에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는 음악가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이 앨범 전체에 흐르는, 누군가에겐 의외고 누군가에겐 신선할 다양성과 변칙성들은, 그의 욕심을 정당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의 아홉 곡은 그의 삶에서 직접 출발한 이야기들, 단편선이란 음악가의 눈과 귀로 담은 오늘의 모습과 음악을, 가장 효과적으로 들려주기 위해 긴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그가 뚝심 있게 한껏 부려온 욕심에 부응할 만한 결과물이 바로, 풍성한 결과 함께 세상에 내어놓는 이다.
글 미묘 (뮤지션, krrr.kr 운영자)
단편선은 한국의 음악가이다.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음악들을 듣고 자라났다. 2004년 4인조 기타팝 밴드로 첫 무대를 가졌으며 2006년부터는 회기동 단편선이라는 이름의 솔로 프로젝트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옛 가요와 영미 언더그라운드 포크, 인디록을 베이스 삼아 사이키델릭, 슈게이징, 포스트 메탈, 노이즈/아방가르드, 국악 등 여러 장르의 문법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즐긴다. 음악 외에도 활동가, 프리랜서 기고가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2010년부터는 자립음악생산조합과 기본소득 청‘소’년 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