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진미 (眞味)]
'나팔꽃' 은 '윤수희' 와 '이수연' 으로 이루어진 여성 듀오다. 2013년 결성했으며, 한국대중음악상 축하공연, 제8회 레코드폐허 등의 이벤트에서 그 모습을 보여준 바 있으며, 인디 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난 무키무키만만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지난 5월 15일 첫 싱글 [전기 올랐어요] 를 발표했으며, 뒤이어 첫 EP [진미] 를 선보이게 됐다. 싱글 [전기 올랐어요] 에 대한 첫 인상은 농염하다 였다. "전기, 올랐어요" 라는 가사를 트로트풍, 혹은 60~70년대 대중가요풍 멜로디로 간드러지게 노래하는 두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복고풍의 농염한 여성 듀오 라는 태그를 달고 넘어가기에는, 두 사람의 목소리 사이로 시시때때로 끼어드는 날것의 기타와 드럼 소리들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전달했다.
[진미] 는 [전기 올랐어요] 에서 느껴졌던 농염함과 심상찮은 기운, 두 가지 모두를 높은 수준으로 증폭시킨다. 인턴 3개월째를 맞는 언니의 월급날을 퇴폐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멜로디에 담아 그려낸 소품 "언니가 살게", "난 그대와 누워서 부르스를 추네" 라는 가사 하나만으로 일종의 품격마저 느껴지는 섹시한 긴장감을 전달하는 앨범의 진미 격 트랙 "누워서 부르스", 고전적인 멜로디와 귓가에 맴도는 코러스가 조화를 이루는 마무리 "전기 나갔어요" 는 이 EP의 제목이 왜 [진미] 인지를 청자들에게 각인시킨다. '이수연' 의 진하고 아슬아슬한 목소리와 '윤수희' 의 가벼우면서도 발랄한 목소리는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을 가지고 트랙들에 농염한 색을 칠해 나간다.
그러나 농염함만이 전부는 아니다. 심상찮은 기운 또한 한 몫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그 기운을 이끌어내는 것은 일차적으로 기타 소리다. '나팔꽃' 의 기타는 굉장히 전형적인 신파조 멜로디를 연주하다가도 일순 그 태세를 전환해서 어둡고 탁한 사운드를 뿜어낸다. 흐느적거리듯이 소리를 뚝뚝 떨어뜨리는 "전기 올랐어요" 의 기타 솔로, "누워서 블루스" 중반부부터 이펙터가 잔뜩 걸린 채로 사이키델릭하게 부지직거리는 기타 소리 등은 그런 변화무쌍한 모습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기타뿐만이 아니라, 포크 듀오 '김사월X김해원' 의 한 축인 '김해원' 이 참여한 프로듀싱 역시 [진미] 의 심상찮음을 가증시킨다. EP 전체에 '김해원' 특유의 텅 빈 듯한 깊은 공간감이 살아 있으며, 음악 전면에 나서는 '나팔꽃' 의 목소리와 기타 사이로 눈치채기 쉽지 않은, 그러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앰비언트 사운드가 쓸쓸함을 더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칫 농염함 만으로 쏠리기 쉬운 EP의 무게추를 다잡으면서 이들의 음악에 다층적인 매력을 더해 준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팔꽃' 의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 느끼는 인상은 트로트 같다는 느낌일 것이다. 물론 트로트적 요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적 원류는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의 소울 사이키 가요들에 맞닿아 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펄시스터즈와 이정화, 김추자, 김정미 등의 이름들을 알고 있다면, 사이키델릭한 기타 소리와 옛 가요의 단조 멜로디를 지닌 '나팔꽃' 의 음악이 한국 사이키델릭 팝의 클래식들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진미] 는 이 음악들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 좀 더 '나팔꽃' 만의 흐름을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그런 독자성을 살리는 요소로는 공간감이 살아 있는 프로듀싱과 로파이한 사운드의 질감, 잘 베어 든 양념같이 음악의 맛을 살리는 전자음의 활용, 전기-전기-전기-전기 같이 엉뚱하지만 귀여운 매력의 후렴구 등이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나팔꽃' 은 과거의 음악적 유산을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 인디 씬의 역사를 되짚어 봤을 때 '나팔꽃' 과 유사한 지향점과 레퍼런스, 형식을 취했던 뮤지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롭지 않은 것 과 고유한 것은 서로 분명히 다른 특성이다. 이제 막 데뷔 EP를 냈을 뿐이지만, 이 듀오는 이미 자신들만의 농염한 기운을 널리 퍼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진미] 는 그 개화의 시발점을 알리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정구원, 대중음악웹진 'weiv')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