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 [세계관 (世界觀)]
해일이 해안가를 덮치기 직전에는 해안가에 있는 물이 원양 쪽으로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물빠짐 현상이 발생한다. 빠져나간 바닷물은 짧은 순간 다시 육지로 덮쳐 올라와 모든 것을 휩쓸어간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난 다음 '해일(Hail)' 이라는 밴드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해안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치고 올라오는 바닷물의 흐름이 느껴질 것이다. 누군가는 이들의 영어 표기를 따라서 쏟아져 내리는 우박을 상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해일' 은 '김석' (드럼), '정희동' (베이스), '미장' (기타), '이기원' (기타, 보컬)으로 구성된 4인조 포스트록 밴드다. 2011년 결성되어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2012년 10월에 열린 언더그라운드 음반마켓 제2회 레코드폐허에서 첫 데모를 판매했다. 2015년 2월에 열렸던 제9회 레코드폐허에서는 "세계관" 과 "소실점" 이 실린 싱글 [1017] 이 공개되었으며, 이 싱글은 락카로 뒤덮인 싱글 커버만큼이나 짙고 뿌연 사운드를 들려주면서 데뷔 앨범의 예고편 역할을 수행했다. [세계관] 은 밴드 결성 후 4년만에 공개되는 첫 정규앨범이며, '단편선과 선원들' 의 [동물], '404' 의 [1], '꿈에 카메라를 가져올걸' 의 [슈슈 EP] 등을 작업한 머쉬룸 레코딩 (Mushroom Recording) 이 공동 프로듀싱과 레코딩, 믹싱을 맡았다.
호기로운 기타 소리로 앨범을 열어젖히는 "그것은 어제 일어났다" 에 뒤이어 나타나는 트랙 "Santa Fe" 를 들어 보자. 희망적으로 울려 퍼지는 기타 멜로디와 별이 숨쉬고 있어 / 달은 춤추고 있어 라는 수줍고도 결의에 찬 노랫소리가 공존하는 전반부는, 잠시 동안의 고요하면서도 가슴 떨리는 막간을 거쳐서 트레몰로 기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후반부로 연결된다. 마치 평화로운 바닷가와 물이 빠져나간 바닷가, 해일이 덮쳐 올라오는 바닷가를 그려내듯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Santa Fe" 는 이들을 가장 기억에 남게 만드는 트랙일 것이다. 하지만 불꽃놀이처럼 번쩍거리는 선율에 취하는 것도 잠시, 앨범은 가벼우면서도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드럼 연주가 인상적인 포스트록 넘버 "Fwd:", 안개 낀 해안가처럼 희뿌연 기타 노이즈로 가득한 "세계관", 달콤한 잔향을 남기면서 밤의 어둠을 노래하는 "어딘가 여기에" 를 거치면서 밀려드는 바닷물을 맞이하듯이, 조금 더 차갑게 침잠해 나간다. 그리고 11분이 넘는 클라이막스 "Hazy Dive" 에서, 이전 트랙들에서부터 쌓아 올렸던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고, 동시에 붕괴해 나간다. 혼돈 속에서, 마지막 트랙 "소실점" 이 피어 오른다. 파괴된 풍광을 비추는 태양처럼, 쓸쓸하지만 따뜻하게...
이들의 해일 같은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는 세심하게 짜인 기타 연주와 노이즈, 서서히 확장되어 나가는 공간감, 정적과 격정이 나선을 이루어 교차해 나가는 기나긴 악곡 구조 등이다. 우리가 흔히 '포스트록'이라고 일컫는 장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한없이 낯설지만 익숙한 이들에게는 더없이 친숙한 음악적 재료들 말이다. 당신이 '모노 (Mono)' 나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 (Explosions In The Sky)',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프렌지(Frenzy)' 등의 밴드를 좋아한다면, [세계관] 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앨범이 될 것이다. 기타와 기타 소리 사이의 조화와 결합, 부딪침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특히 더.
하지만 '해일' 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단순히 ‘기타 인스트루멘탈 록’으로 분류되는 영역을 조금 더 넘어선 곳까지 자신들의 음악을 이끌어 나간다. 보컬 '이기원' 의 잔잔하고 맑은 목소리에서는 언니네 이발관이나 챔피언스 등 한국 인디 씬을 풍미했던 모던 록의 향취가 읽히고, 어지럽게 얽힌 노이즈 속에서도 끊임없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추구하는 모습에서는 라이드 (Ride)나 슬로우다이브 (Slowdive) 등 90년대 초 영국 슈게이징 씬의 개척자들이 연상된다. 비록 조그마한 인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특성들은 '해일' 을 다른 포스트록 밴드들과 분명하게 구분 짓는 장치로서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장르적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강점을 응축한 또 다른 훌륭한 포스트록 앨범이 등장했다. 그러나 [세계관] 을 단순히 훌륭한 포스트록 앨범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이 작품의 매력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깊은 밤의 고독 속에서 "어딘가 여기에" 의 잔잔한 기타 선율을 받아들이는 일, 술 한 잔을 기울이면서 "세계관" 의 노이즈 바다에 취해 잠기는 일, "Hazy Dive" 의 격렬한 파고에 따라 머리를 흔들어대는 일. 이 앨범에 실린 모든 연주와 사운드가 당신의 감정에 어떤 파도를 일으키는지를 느끼는 일. 그것이야말로 [세계관] 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해일' 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밴드다. (정구원, 대중음악웹진 "weiv")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