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처럼 다가온, 재즈의 매력이 가득한 낭만적 남성 보컬
한국 재즈는 지난 몇 년 사이 연주자의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음악적으로 보통 신(scene)이라 할 수 있는 무엇을 형성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연주자 층이 두터워진 것은 향후 한국 재즈의 보다 큰 도약을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남성 보컬리스트의 수가 많지 않은 것, 아니 거의 없다는 것은 아쉽다. 여성 보컬리스트는 그래도 스타일의 다양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제법 되는데 말이다. 물론 재즈는 성악보다 기악이 더 중심이 된 음악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남성보다 여성 보컬리스트가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재즈가 늘어난 연주자의 수에 비해 대중적 기반이 아직 탄탄하지 못 했음을 생각하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보컬리스트의 수가 많아야 한다. 그리고 보다 폭넓은 감상자 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성 보컬리스트와 함께 남성 보컬리스트도 충분히 있어야 한다.
평소 이런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차에 어느 날 밤 프로듀서 홍지현이 '막 녹음을 마친 것'이라며 내게 음원을 보냈다. 그래서 무덤덤하게 듣기 시작했다. 피아노 트리오의 짧은 인트로에 이어 남성 보컬리스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리듬을 타며 노래하는데 강약을 조절하고 목소리의 톤을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가 외국의 보컬리스트와 작업을 했나' 생각했다. 그가 말한 김주환은 피아노 연주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노래의 주인공이 김주환이란다. 그러니까 내가 들은 앨범이 한국 남성 보컬리스트의 앨범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김주환 외에도 한국에 남성 보컬리스트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재즈 보컬 하면 떠오르는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보컬리스트는 현재로서는 김주환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올해 29세인 이 젊은 보컬리스트는 다른 음악적 조건 이전에 오직 노래 하나로 감상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설령 재즈의 어법에 낯섦과 어려움을 느끼는, 재즈 밖에 위치한 감상자에게서도, '다른 건 몰라도 노래는 잘 부르는군'이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갖고 태어난 복(福) 혹은 재능이 아닌가 싶다. 실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정식 보컬 수업은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22세 무렵에 반년 정도 수업을 받은 것이 전부라 했다. 이런 그가 지금은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아 몇몇 대학과 고향 전주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전문 학원에서 보컬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사이 부단한 노력으로 교습에 필요한 학력 조건을 갖추었다.) 전문 보컬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은 대신 그는 지속적으로 다른 재즈 보컬리스트들의 노래를 들은 것 같다. 그 가운데 나는 그의 노래에서 토니 베넷(Tony Bennett)의 감정 표현력, 멜 토메(Mel Torme)의 일정한 톤 유지력과 커트 엘링(Kurt Elling)이 가진 저역대에서의 힘 조절, 그리고 제인 몬하이트(Jane Monheit) 같은 미성의 여성 보컬리스트가 지닌 부드러움을 발견한다. 아마도 그는 이들 보컬리스트들의 노래를 듣고 수없이 따라 불렀으리라.
그렇다고 단순히 그가 선배들의 장점을 따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이번 앨범에 담긴 그의 노래는 백지 상태에서 명 보컬리스트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또 흡수하여 자기 색으로 만들어 나간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이 앨범의 가장 큰 미덕은 김주환의 기교적 탁월함이 아니라 그 기교를 잘 활용하여 그의 의도대로 연출된 낭만성에 있다. 그 낭만성은 곡마다 하나의 상황을 상정하고 이를 연기하듯 노래하는 것을 통해 구현된다. 예를 들면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All of You"에서 그는 자신감 가득한 남성이 한 여인을 쥐락펴락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요즈음 유행하는 차가운 도시 남자의 모습이랄까? 그것도 멋지게 수트를 갖춰 입은. 이것은 "Days of Wine and Roses"와 "Fever"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그가 노래한 곡들이 그의 개인적인 취향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Kissing a Fool"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여유로운 남성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한편 "Stardust", "My Melancholy Baby"에서 그는 여성적인 느낌을 줄 정도로 부드럽고 섬세한 남성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힘을 빼고 노래한 "L-O-V-E"에서는 막 사랑을 시작해 꿈을 꾸는 듯한 소년 같은 모습을 보이더니 "The Look of Love"에서는 상실감 가득한 비련의 남자로 변신한다. 나아가 보너스 트랙(CD에만 수록된 히든 트랙)에서는 떠난 사랑과 흘러간 시간을 반추하는 쓸쓸한 쳇 베이커(Chet Baker)형 남성이 된다. 이처럼 김주환은 톤과 강약, 그리고 (스윙 감각을 바탕으로 한) 속도의 미묘한 조절을 통해 다양한 남성이 되어 노래한다. 그래서 그 남성의 모습이 한 남자의 목소리에서 나왔다는 것에 놀라게 한다. 게다가 신기한 것은, 차가운 도시 남자이건, 사랑에 들뜬 소년이건, 여성적 섬세함을 지닌 부드러운 남자이건, 지난 사랑의 기억에 힘들어 하는 남자이건 간에 그 모든 남성의 모습이 모두 낭만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곡에 흐르는 낭만성이 이 다양한 남성성들을 하나로 모아 감상을 혼란스럽지 않게 한다.
한편 곡과 곡 사이를 넘나드는 다양한 남성성의 표현은 물론 함께 한 연주자들의 호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피아노 트리오에 기타나 트럼펫이 필요에 따라 가세하는 밴드는 스윙을 기반으로 고전적인 풍취와 도시적 세련미를 동시에 표현한다. 그리고 보컬을 충실히 지원하면서도 간결, 담백한 솔로로 김주환이 발산하는 낭만성을 이어가는 적극적인 호흡을 유지한다. 특히 피아노, 트럼펫, 기타가 보컬과 합을 맞추는 "Stardust"는 이 앨범을 노래가 아닌 전체 사운드의 측면에서 감상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또한 "My Melancholy Baby"에서 이정하의 피아노, 보너스 트랙에서 김효진의 기타는 보컬에 버금가는 매력을 발산한다. 어떤 이는 한국 재즈를 한국이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보곤 한다. 즉, 미국이나 유럽 연주자들에 비해 한국 연주자들이 모자란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강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광의적으로 그렇다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뛰어난 재즈를 담은 앨범들 상당수가 그에 상응하는 만큼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앨범만 해도 내가 '드디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김주환의 첫 번째 앨범이 아니다. 이미 지난 2012년 10월 첫 앨범 [My Favorite Things]로 그는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었다. 혹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실은 아쉽게도 그 첫 앨범은 제대로 알려질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다시, 평소 노래하겠다고 메모해 둔 곡들 가운데 아홉 곡을 골라 이렇게 새로운 앨범을 녹음했다. 그것도 더욱 더 완성도가 높은 앨범을. 게다가 이미 세 번째, 네 번째 앨범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남성 재즈 보컬리스트에 대한 사명감마저 느껴지는데 아무튼 이번 두 번째 앨범만큼은 부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양한 공연에서 그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아마도 많은 여성들이 그의 노래에 매혹되고 많은 남성들이 그를 질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흔한 주례사가 아니다. 분명 그는 대중적 호응을 얻을 만한 뛰어난 재능(the best gift)을 지녔고 이 앨범 역시 적어도 2013년 최고의 선물(the best gift)이 될만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