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YE' [JUNK PIXEL / EMPTY SPACE]
2014년 한국 비트 신에 커다란 획을 그은 그레이가 2015년을 여는 첫 픽셀. 오혜진 작가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JUNK PIXEL" 과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김오키가 참여한 "EMPTY SPACE". 사운드의 원류를 좇으며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상상해 완성한 비트 없는 비트 뮤직.
"비트 신의 음악이야말로 disposable, 일회성의 슬픈 숙명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 페이지를 리프레쉬하듯 아이디어들이나 훌륭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음악들도 거대한 블로그스피어 안에서 순식간에 줌아웃 되면서 점점 작은 픽셀 하나로 수렴한다. 음악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사용자(리스너보다는 사용자가 적절한 표현 같다)의 자유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회자되는 주기가 짧다는 말이다"
'그레이(GRAYE)' 의 [MON] 이 발매된지 4개월 후 'MON REPLAY'라는 이름으로 [MON] 음반을 다시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디구루DGURU, 캐스커CASKER,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 모하비mojave, 나잠수, 회기동 단편선 등이 [MON] 음반의 리뷰를 쓰고 그레이가 직접 쓴 [MON] 작업기와 'GUMGANG RIVER (feat. 후쿠시 오요fuckushi oyo)'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딱 1년 전의 일이다. 위 코멘트는 그때 디제이 소울스케이프가 쓴 리뷰의 서두다. 이후 그레이의 1년은 저 슬픈 숙명에 저항하기 위해 채워졌다.
한국의 비트 신에서 가장 잘하는 프로듀서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겠지만 가장 열심히 하는 프로듀서로 '그레이' 를 뽑아도 크게 무리 없을 것이다. '그레이' 는 작은 픽셀이 되지 않기 위해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픽셀을 더하며 꼬리를 키우는 게임의 뱀처럼 끊임없이 움직였다. 프로듀서들의 비트 배틀 헤드룸 락커스Headroom Rockers 출연. 9034, 오희정, 킴 케이트Kim Kate, 쾅 프로그램Quang Program, 라디오포닉스Radiophonics, Cabinett 등의 리믹스 작업. 그의 군산 크루 애드밸류어Addvaluer의 컴필레이션 [Bad Things] 발매. 작은 픽셀이 되지 않고 살아남은 해외의 스타 프로듀서들 - starRo, Nguzunguzu, Untold, Fatima Al Qadiri의 파티에서 디제잉. 75A의 'DAMAGED'와, 싱글 [{ notinparis}] 발매까지. 그의 지나친 작업에 하드디스크가 망가지지만 않았어도 이 페이지 전체를 '그레이' 의 작업만으로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자, 이제 2015년이다.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던 한국의 비트 신은 비록 대단해지진 않았지만 본래 그 음악 LA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언더그라운드를 기반으로 더 흥미로워지고 있다. 16색 EGA 밖에 표현못했던 비트 씬은 이제 다양한 픽셀의 등장으로 256 컬러 VGA를 표현하려 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작년 한 해 가장 주목받은 비트 신의 프로듀서 '그레이' 는 겸연쩍은 듯 이렇게 말한다. "뭐, 내가 보여주려는 건 텅 빈 우주(EMPTY SPACE)에 놓인 쓰레기 픽셀(JUNK PIXEL)의 기록이야."
'그레이' 는 최신 유행을 좇고 거창한 곡을 만드는 대신 자신이 만드는 음악의 원류를 따라 더 미니멀하고 섬세한 사운드에 중점을 둔 곡을 만들었다. "JUNK PIXEL"은 대림미술관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 당구장에서 열린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작가의 전시 'Walk In The DOCUMENT' 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사진과 픽셀 아트워크를 꼴라주한 오혜진 작가의 작품과 연결되는, 인상적인 룹과 베이스 뮤직에 기반을 둔 비트로 만들어진 곡이다. 도입부부터 반복되는 룹의 사운드는 언뜻 유령의 울음소리 처럼 들린다. [JUNK PIXEL]은 오혜진 작가의 아트워크가 포함된 패키지로 암페어AMFAIR와 같은 전자 음악 페어에서 성황리에 판매됐다. 이후 이 곡을 디지털 싱글로 발매하려던 그레이는 아직 못한 이야기가 남은 기분이 들었다. 마스터링까지 모두 마쳤지만 발매일을 무작정 미루고 'JUNK PIXEL'을 만들었던 때와 같은 프로세스로 "EMPTY SPACE" 라는 곡을 만들었다. "JUNK PIXEL" 이 픽셀 단위의 비트와 룹이 전진하는 듯한 곡이라면 "EMPTY SPACE" 는 비어 있는 공간에 관한 곡이다. 이번 싱글은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상상하며 만들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레이는 비트 없는 비트 뮤직 목표로 작업했다. 만들어둔 공간에는 그레이가 평소 좋아하던 색소포니스트 김오키를 초대했다. 그레이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김오키는 스튜디오에서 즉흥으로 연주했다. 그렇게 녹음한 10개의 테이크 중에서 첫 테이크가 곡에 쓰였다. 만들어진 곡은 새로운 시대의 재즈처럼 즉흥적인 에너지와 섬세한 바이브로 차 있다. 이렇게 두 개의 싱글이라기보다 하나의 음반으로 [JUNK PIXEL / EMPTY SPACE]가 완성됐다.
[JUNK PIXEL / EMPTY SPACE]의 정서는 [MON]보다 한층 어둡고 기이하다. '그레이' 가 "JUNK PIXEL" 을 작업하던 때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한 진도와 멀지 않은 항구 도시 군산에 사는 '그레이' 는 이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연스럽게 곡에 그때 느꼈던 감정이 반영됐다. "EMPTY SPACE" 에는 아이들이 찍은 마지막 동영상에 나오는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게 샘플링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참담한 사고를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MON]이 그레이가 매일 몇 시간이고 산책하던 군산이라는 공간에 관한 기록이라면 [JUNK PIXEL / EMPTY SPACE]는 세월호 사고로 겪어야 했던 시간의 기록이다.
[JUNK PIXEL / EMPTY SPACE]의 커버 아트워크와 비디오는 텀블러 시대의 그래픽 디자이너 김연yeon_keixx이 디자인하고 감독했다. 음반의 마스터링은 그레이와 계속 함께 작업하고 있는 박경선Boost Knob이 맡았다. 음반의 콘셉트를 살리기 위해 마스터링을 세 번이나 수정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레이의 멘토 무드 슐라Mood Schula는 음반을 모니터링하고 조언을 건넸다. 만약 당신이 눈치가 빠르다면 이 음반에서 무드 슐라의 최근 작업과의 링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렇게 복잡하고 빠른 세계에서 또 하나의 픽셀이 만들어졌다. 당신이 이 픽셀을 즐기는 사이 그레이는 재빠르게 선을 그릴 다음 픽셀을 선뵐 것이다. 그때까지 가능한 조용한 환경에서 차분하게 이 음악을 감상하길. 그의 다음 작업이 궁금하다면 다음 문장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75A, The Most Beautiful Siz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