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부스 (Phonebooth)' [극지]
'현재 대부분의 인류는 도시에서 살아간다. 밤낮으로 불빛들은 꺼질 줄 모르고 찬란하여 별자리로 더듬거렸던 미지와 신화는 책 속의 활자 또는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 박제됐다. 우리는 '이성'(理性)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세상의 실체들을 발굴해 냈으며 (이는 과학철학분야에서 아직 논쟁이 되고 있지만 대부분 우리는 그것을 '객관'이라고 믿고 있다.) 수많은 생활의 편익을 이룩했다. '도시'라는 공간은 그러한 수확들이 집중된 곳임과 동시에 그 결과물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능적 측면으로만 치우친 이성의 도구적 성격은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켰다. 공간을 구분해주고 추위와 소음을 탁월하게 차단해주는 문과 벽들은 그 반대급부로 분열과 단절이라는 심리적 정서를 낳게 되었고 우리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상실과 소외를 끊임없이 견뎌내야만 한다. 또한 이 현상에 대한 연장으로 우리는 중독 혹은 자학과 같은 비이성적 애착이나 강박이라는 질병을 앓아야 한다. 우리의 정서가 도시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문학을 중심으로 많은 분야에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도시의 구조에 대한 인식이 '효율성'에서 '자연친화', '사람중심'이라는 기치로 변화되면서 사람과 인공적 구조 사이에 적절한 조화를 이루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좁혀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할 노래들의 전체적인 공간적 테마를 이루는 '키비타스'(Civitas)는 라틴어로 '공동체', '공동체 의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폰부스'는 6개의 연작을 통해 바로 앞서 언급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비윤리적인 도시의 구조 사이에 놓인 우리들의 불현한 모습들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1. 확장과 뿌리
도시는 모든 신체 기능의 확장애서 비롯됐다. 망치나 드라이버와 같은 연장은 손 기능의 확장이며 안경과 TV는 시각 기능의 확장이다. 이어폰과 전화기는 청각, 그리고 땅 끝까지 이어진 아스팔트와 그 위를 지나가는 각종 운송수단들은 발 기능의 연장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이 외에도 대부분의 발명품은 이러한 신체 기능의 확장을 담보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가 시골의 전원과 다른 점이 이 점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바로 뿌리가 없다는 것, 우리는 땅 위를 밟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땅 위에 놓인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을 밟을 뿐 실재의 대지를 걷는 것이 아니다. 놀이터나 화단의 흙을 밟을지라도 그것 또한 복제된 것일 뿐이다. 다른 신체의 기능들 또한 마찬가지로 망치와 각종 연장을 사용함은 우리에게 실재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의 상실을 불러오고 TV와 이어폰을 통해 얻는 시청각적 경험 역시 복제된 실재일 뿐 진짜 소리와 빛깔을 보고 듣는 것이 아니다. 직접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는 시골의 농부와 비교해 보면 대부분 우리의 경험은 모든 것이 간접체험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도시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끊임없는 공허와 허무로 내모는 이유이다. 도시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산해 내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소외당하기 때문이다. 교외의 도랑이나 개울, 그리고 들판과 그 위에서 자연스레 자라난 꽃들이 더 관념처럼 느껴지고 실제를 경험하기 위해 꽃 축제 혹은 수목원 등을 찾아가 보지만 이 또한 인공적으로 조성된 관념적 자연의 현실화 일 뿐이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이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그나마 우리가 정착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마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직접 키우고 길러낸 것보다 잃어버린 것들이 훨씬 많으며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물론 죽음과 동시에 대부분의 삶의 시간을 향유한 도시를 떠나 전혀 엉뚱한 곳에 가서 묻혀야 한다는 점.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과 방황은 바로 이러한 뿌리의 부재 위에 세워진 도시적 정서 때문이다. 도시는 이러한 정서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2. 분열과 상실
역설적으로 도시는 잃어버린 것들의 더미이다. 우리는 수없이 바뀌어가는 도시를 걸을 때마다 매번 달라져 있는 거리들을 쉽게 목격 할 수 있다. 간판은 언제나 새로운 발음과 불빛으로 바뀌어 있고 기존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새로운 미소와 표정들로 대체되어 있다. 이렇게 매일 낯설어지는 거리를 걸어가다 문득, 저 사라진 간판과 그 가게의 주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면 누구나 무엇인지 모를 답답함과 까마득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의 공간이 변형된다는 것은 이전의 기억에 변형을 불러오며 그 실재가 남아있지 않다면 내가 가진 기억의 복원 또한 불가능하게 된다. 끊임없이 변형된 기억과 정서는 결국 주인을 잃어버린 견공처럼 털이 자라 눈을 가리고 금방 지저분해져 점점 실재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훼손된 기억들은 존재의 모호함으로 이어지는데 (증명할 수 없는 기억들로 가득 찬 존재는 얼마나 불안한가?) 도시에서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할 때 우리는 내가 가진 이름과 몇 개의 숫자, 그리고 몇 장의 종이 쪼가리에 기댈 수밖에 없다. 어떠한 공간과 사물도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지 못하고 또 그 전에 이미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얇은 존재의 두께와 쉽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총체적이고 통합성이 결여되어 있는 도시의 공간성은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 따돌림을 주도하고, 사회적 명망가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성범죄를 저지르는 아주 기형적인 의식의 분열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더욱 암담한 이유는 우리의 정체성을 복원하고 존재를 재현해 내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많은 시간을 방황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3. 탈락과 매몰
높은 빌딩들의 수직은 수많은 추락을 담보한 채 세워졌다. 새들, 바람들, 심지어 인간들까지. 우리는 거리에서 어디를 가더라도 끝없는 수직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높이를 관통하기 위해 수많은 가까운 것들을 떨어트려야만 한다. 친구, 가족, 사랑, 신뢰, 자존감 등, 내 주변의 이러한 가치들을 하나하나 다 밀쳐 버렸을 때 우리는 진정 꼭대기에 홀로 서 있을 수 있다. 인간성을 버려야만 더 높은 층에 오를 수 있는 도시는 수많은 희생으로 키워진 철부지 자식처럼 다루기가 어렵다. 이와 동시에 도시는 매몰시킨다. 수많은 방향을 가로 막은 벽과 그 벽마다 매단 유리창 안으로 온기와 불빛을 쌓아두고 밖으로는 단 1도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불온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인간성의 말살과 인간의 도구화를 제도적으로 합리화 시켰으며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 시켜 왔다. 그 안에서 고통과 외로움에 매몰되어 우리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좁은 삶을 살게 되고 우리는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각 도시의 모퉁이에서 장기말처럼 삶의 전선으로 매몰되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탈락과 매몰, 분열과 상실, 뿌리의 부재로 완성된 도시의 빌딩 사이를 유령처럼 겉도는 부서진 바람들은 더욱 날카롭고 차가우며 매서워졌다. 마치 우리처럼.
이번 프로젝트의 제목은 '키비타스'다 라틴어로 공동체, 공동체 의식을 뜻한다. 앞서 본론에서 우리는 도시라는 공간의 피폐함과 부정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실 뚜렷한 해결 방법이 없는 문제들의 나열일 수 있고 또 위에서 언급하지 못한 다른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이러한 '출구 없음'은 우리를 더욱 우울하고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프로젝트 이름을 '키비타스'로 정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해답이 이 단어 안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공동체, 즉 '너'와 '내'가 바로 그 해답이라고 제시하고 싶다. 우리는 이제 어딜 가나 고아이며 길 잃은 미아다. 이런 상황에서 등불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내 옆에 있는 나를 닮은 타자 즉 '너'와 '당신'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서로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그 아픔 또한 다르지 않다. 다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우리는 공동체, 공동체 의식만이 이 산파되고 분열된 도시의 야윈 삶 앞에서 흩어지지 않고 수없이 몰아치는 격랑 속에서 서로를 잊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과 희망을 2016년 올해, 노래 해 보고자 한다.
글 : 박 한 (폰부스 베이시스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