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속해있는 밴드를 거론하는 것이 이 독립적이고 내밀한 음반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 것 같다. 이 장르가 가진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면들이 긴 시간 꼼꼼하고 굳게 새겨진 음반이다. 오랜 준비를 끝내고 바깥세상에 나서는 뮤지션에게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조월 (모임 별, 우리는속옷도생겼고여자도늘었다네)
nuh가 곧 서명훈이다. 그는 불싸조와 여느 하드코어 밴드들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다. 모 음반매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때문에 K-팝에 밝은 편이다. 그는 단순히 K-팝에 대한 통계뿐만 아니라 노래들의 가사마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다. 학창시절에는 실베스타 스탤론의 [록키] 시리즈를 좋아했다. 그는 일반 사람들은 기억조차 하지 않는 [록키] 시리즈의 명대사들을 되뇌곤 했다. 특히 4편에서 아폴로 크리드가 드라고와 대결하는 도중 록키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링 위에 수건을 던지지 말라"는 대사를 자주 말했다. 록키는 아폴로의 투지를 인정해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고 결국 경기도중 아폴로 크리드는 사망한다.
[LIFE]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고, 비참하며, 잔인하고, 게다가 짧다." -토마스 홉스
서명훈은 다른 밴드들에서 활동하는 와중 틈틈이 준비해온 자신의 독집을 이제서야 내놓았다. 적절한 숙성기간을 거쳤고 따라서 조급해하지 않는 작품이 됐다. 타이틀은 [LIFE]이다. 스스로의 설명에 의하면 이는 한국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관한 레코드라 한다.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저 단순하게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피로감, 혹은 맹목적인 희망 따위를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곡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단순히 말로써는 설명되지 않는 삶이라는 존재를 음수 하나하나를 통해 묘사해내고 있다. 밥 딜런의 명곡 'Workingman's Blues #2' 같은 곡을 듣는 기분으로 이를 감상하면 될 것 같다.
[LIFE]는 기타 중심의 연주곡과 몇몇 보컬 곡들로 채워져 있다. 슈게이즈와 둠게이즈, 그리고 드림팝과 포스트-펑크가 적절하게 뒤섞여있다. 앨범은 조용히 타오르는 감정을 평온하면서 농밀하게 전개시켜나간다. 몇몇 연주 중심의 밴드들을 레퍼런스로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FOR MY HOPE'의 경우 모과이처럼 텍스쳐를 쌓아 올려나가는 방식의 드라이브 톤을 좋아한다면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멜로우한 기타 아르페지오로 내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BROTHER AND FAMILY'는 단순한 충동이나 젊음에 맡긴 질주감과는 별개의 단단한 공기와 편안한 선율을 유지시켜낸다. 섬세하다기 보다는 투박한 모양새를 지녔지만 이는 나름의 울림을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보컬이 삽입된 트랙들의 경우 데드 캔 댄스의 브랜던 페리 같은 신비한 중저음의 음성으로 채워냈다. 이 목소리는 희뿌연 안개 뒤에 숨겨져 있다. 느린 템포의 발라드 'ON THE ROAD AT NIGHT'는 상실감과 애수를 적절히 배치시켜내고 있으며, 포스트-펑크 트랙 'GOROROGORORO', 둠의 퍼즈와 희미하게 빛나는 잔향을 섞어낸 'GOODBYE YOUR WORLD' 역시 대놓고 고딕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보컬의 음색과 코드의 전개에 있어 디스 모탈 코일 류의 곡들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서정성을 읽어낼 수 있다. 좀 더 거친 톤의 매지 스타처럼 시작해 [트윈 픽스]의 세계관을 관철해내고 있는 'IN THE DARKNESS INTO THE LIGHT' 역시 8, 90년대 4AD의 정서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투명한 밤 공기에 조용히 녹아 들어가는 소리들이다. 한 개인에 의해 완성된 앨범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사적인 영역에 발을 내딛는 것 같은 세계관이 존재한다. 취한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독백처럼 명확하지 않은 의식 속에 울리는 잔향은 이것이 현실인지 허상인지를 가늠하기 어렵게끔 하지만 대신 아름다운 왜곡이 형성된다. 그런 순간들, 그리고 감정을 앨범은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부드럽게, 그리고 담담하게 노래들이 이어진다. 삶의 구석에 존재하는 어둡고 침울한 고뇌, 그리고 한 줄기 희망 사이에서 이 노래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생각해 볼만한 여지를 듣는 이들에게 남긴다. 자신의 삶에 거쳐간 다양한 빛과 그림자를 토대로 감상자들은 이를 자신의 경험에 반추해보게 된다. 앞서 [록키]를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이 앨범에는 조용한 파이팅이 존재한다. 본 작 역시 아폴로 크리드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고 있다. 이것은 그러한 삶의 자세에 대한 기록이다. 떠들썩하거나 요란하지 않은 삶의 찬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