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버즈 (Guten Birds)' [Things what may happen on your planet]
언젠가부터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에서 짙은 피로가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일까. 이건 물론 단순한 나른함에서 오는 피로가 아니다. 무언가에 대한 불만 또는 분노, 누군가에 대한 불쾌감 같은 것에서 오는 피로이다. 육체가 아닌 정신적 피로인 셈이다. 인디 음악이 그러지 않은 때가 언제 있었나 하는 반문을 듣자고 한 얘기는 아니고 그 감도나 강도의 일관성이 이전에 비해 더 단단해졌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전범선과 양반들', '단편선과 선원들', '잠비나이', '줄리아 드림', '미씽 루씰', '이상의 날개', '김태춘', '강백수'. 근래 줄줄이 신작을 내놓은 이들 음악에는 어떤 공통된 정서가 있다. 불안, 슬픔, 분노, 절망, 당황 그리고 그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한 줌의 환희와 희망. 그 중엔 비밀스런 개인의 사유에서 비롯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수선한 사회와 주변을 둘러보고 느낀 감정,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인디 뮤지션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들의 통탄할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나는 보았다. 그걸 보면서 나는 무언지 모를 피로를 느낀 것이고 그 피로는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니리란 판단에서 지금 이 글을 시작한 것이다.
이 글은 인디 록 밴드 '구텐버즈'의 첫 정규작을 위한 글이다. 2012년 8월에 처음 이들의 미니앨범(EP)을 들었으니 4년하고도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그들 음악을 마주한 셈이다. 당시 EP를 들으며 웹진 [음악취향Y]에 썼던 '짧평'을 보니 나는 이들 음악에서 '소닉 유스'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을 듣고 있었다. 물론 이거다 하는 레퍼런스로서가 아닌 그저 '느낌'이 비슷했다는 정도에서 쓴 얘기 같다.(진짜 레퍼런스라면 당연히 '픽시즈'와 '너바나'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 때 그들의 음악은 느릴 땐 헤비하게 절룩이다 빠를 땐 바람 같은 디스코를 동반하는 패기, 활기 같은 걸 띠었었다. 그래서 지금 "스마일, 김치 그리고 치즈"와 "you in the mirror"가 동시다발로 떠오르고 그런 두 성향을 버무린 "I'll have nothing"도 내 뇌리에 분명히 박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4년이다. 4년이 지났다. 아니, 4년'이나' 지났다. 4년 사이 우리는 많은 것을 보았고 세상도 제 나름 끙끙 앓으며 한 발 두 발 변해왔다. 짓물러 터지기 직전까지 온 청년 실업 사태, 아직도 이유를 모르는 세월호 참사, 중국과 미국의 패권을 둘러싼 사드 이슈, 그리고 뜬금없이 전국을 강타한 지진까지. '구텐버즈'는 이 모든 것들을 직, 간접으로 겪으며 4년을 보냈고 그 사이 사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왔다. 그들은 이것을 "우리의 시간과 작업물은 비례할 수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즉, 시간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고 자신들도 그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다. 그런 것들이 밴드의 음악을 대하는 태도, 연주의 감정을 건드리고 또 규정한다. 그렇게 '구텐버즈'는 EP와 똑같은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다시, '구텐버즈'는 어쩌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 주위를 바라보는 감정의 변화에서 밴드의 변화를 예감했는지 모른다. "불안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사건의 감정들이 우리의 음악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모호의 고백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길, 반짝이며 사라지는 별, 이별을 통곡하는 파도, 어둠을 넘어야 존재할 수 있는 새벽, 홀로 서려 가지를 내는 나무, 어떤 달이라 불리는 달, 쓸쓸한 바람을 맞으며 걷거나 날아다니는 무언가에게" '구텐버즈'의 새 앨범은 조용히 바쳐지고 있다. 또한 이 앨범을 손에 쥔 "당신의 행성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관해 이 앨범은 노래할 것이다. 때문에 앞서 말한 인디 음악의 피로감이 이 앨범에서도 느껴질 것은 자명해 보인다. 당연히 무거운 피로 뒤에 기다리는 건 따뜻한 위로와 공감이라는 연대의 감정일 터. 그렇기에 나는 밝은 밖을 향해 접어든 터널이라 생각하고 이 음반을 플레이 해보길 여러분들에게 권한다. 이 앨범은 그렇게 들어야만 들리는 앨범이다.
첫 곡은 "어디선가 어딘가에서"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를 주제로 곡은 리버브 건 조용한 기타로 시작해 곧바로 강력한 16비트 거친 사운드로 탈바꿈해 질주하는데, 마치 10곡이 꽉 들어찬 이 앨범으로 자신들의 색깔을 분명히 보여주겠다는 의지처럼 들린다. 2013년 네이버 온스테이지에서 이미 공개한 바 있고 본래는 가사도 있었다지만 이렇게 가사를 빼고 연주곡으로 간 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솔로에 가까운 무이의 드럼이 곡을 이끄는 "가나다 별곡"은 난데없는 이별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가나다순으로 푼 곡으로(가사 행들의 앞머리를 보자), 현란한 엇박을 얌전한 정박 왈츠로 템포 체인지 시키는 후반부가 재미있다. 따로 놀면서 서로를 지지하는 두 파트의 이율배반적 느낌이 좋다.
차오르는 밤과 비틀거리는 걸음, 그리고 들썩이는 심장. "울렁이는 밤"은 저 세 가지 현상 또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숙취 같은 기타 톤이 비틀거리고 차오르는 걸음과 밤을 표현했고, 들썩이는 심장은 드라이브 건 일렉트릭 기타와 안개 같은 코러스, 그리고 틈을 주지 않고 육박해오는 드러밍으로 그려냈다. 한 마디로 '취하는' 음악이다.
"밤신호'는 "울렁이는 밤 너머에 무슨 얘기가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만든 '울렁이는 밤 파트2'이다. '작디작은 존재에게 밤이 신호를 보내면 어떨까'가 이 곡의 주제로, 앨범에서 비교적 이지리스닝 트랙으로 분류될 만한 곡이다. 와미 이펙터를 건 뾰족한 기타 솔로에서 불거진 모종의 적막감, 신비감은 "sailing out"의 서곡인 "readiness"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준비, 고민, 결심, 그리고 출발이라는 보편적 과정을 8분30초 대서사로 풀어낸 "sailing out"의 주제는 다름 아닌 인디(independent)이다.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우뚝 선다는 뜻을 가진 그럴 듯한 가치가 현실에선 무척이나 고달픈 가치라는 것. 그들도 이젠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게다. 하지만 '구텐버즈'는, 적어도 음악에서만큼은 '인디'로서 나아가고 음악만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새삼 내세우는 눈치다. 나는 이 곡에서 그런 감회를 읽었다. 준비하고 고민했고 결심했으니 이제 다시 출발할 때라는 얘기다. 어쩌면 '구텐버즈'의 진짜 시작은 바로 이 앨범부터일지 모른다.
암호 같은 가사에 뜻 모를 제목 "킬빌 혹은 우울한 달". "너 때문이야! 라고 할 수 없었다"는 그 "쓸쓸한 사정"을 나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지겨운 가난의 함정'과 '더러운 전쟁'이라는 구절은 이 곡이 가진 정치 사회적 맥락을 대략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게 해준다. 지친 리듬 기타와 보컬, 조난자의 녹슨 절규 같은 기타 솔로가 곡에 잿빛 우수를 더한다. 여기서 쿠엔틴 타란티노를 얘기하는 건 우습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기도 뭣한 묘한 분위기가 이 곡에는 있다. 우리가 죽여야(kill) 할 빌(bill)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마 서먼의 핏빛 난자(亂刺)를 빌어 새날을 맞으려는 어둔 소망이 이 곡에는 있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초저녁 홍제천 산책로를 홀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의 겉모습이 그랬다"는 사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곡 "여기저기 상처 난". 처음엔 거칠게 치받다 '김서현'의 베이스를 다리 삼아 지나면서 곡은 조금씩 차분해진다. 유령처럼 맴도는 코러스들. 상처받은 어떤 이의 모습을 상상을 넘어 직접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이 곡은 갖게 한다.
탐탐(tom tom)을 훑는 드럼이 비밀처럼 다가온다. "rolling in the air". 무슨 뜻일까 했는데 "안개로 가득한 새벽녘 항구에 가족, 고향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태운다는 사연이었다. 앨범에서 두 번째로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한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트랙이라면 맞겠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 곡마다에 드라마를 심으려는 이들의 야심찬 시도는 이 곡을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감성과 감상을 유도하는 힘이 '구텐버즈'의 첫 정규 앨범에는 있다.
그리고 끝 곡 "다를 나를 만나는 날". '다른' 나가 아니라 '다를' 나다. 마치 '강백수'가 타임머신을 타고 아버지에게 가 강남 땅을 사라는 그 심정으로 "내 모습의 생명체"에게 달려가 "이곳으로는 오지 말아라" 전하는 곡이다. 백제 가요 "정읍사"의 여음구를 살린 시도가 참신하다. 장르가 아닌 가사로 '한국적'인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곡은 이슈가 될 만하다.
'구텐버즈'의 풀렝스 데뷔 앨범은 만만하지 않다.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더 귀를 기울여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앨범이라는 뜻이다. 괜찮은 앨범, 다시 듣고 싶은 앨범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앨범도 한 번 듣고 구석으로 밀려날 운명을 다행히 벗어날 듯 보인다. 이 글을 마무리 하는 지금 시각은 새벽 다섯 시 이십 삼 분. 새벽에 들으니 더 좋은 음악이다. 육체의 피로가 풀리는 시간에 정신적 피로를 다룬 음악이 더 살갑게 다가온다는 역설의 이치를 이 앨범은 가르쳐주는 것이다. 자, 이제 당신이 경험할 차례다. (김성대 대중음악평론가)
- credits –
music by 모호, 무이, 김서현
words by 모호
arranged by 모호, 무이, 김서현
guitar, vocal 모호
bass 김서현
drums 무이
produced by 구텐버즈
recorded, mixed at 토마토 스튜디오 (2015년 9월 ~ 2016년 8월)
recording engineer 조윤나
mixing engineer 김종삼
mastered at 소닉 코리아 (2016년 9월)
mastering engineer 강승희
art direction & design by 모호
english consultation by Hiram Piskitel
executive producer 박준범 _Coolluck Music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