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영향 아래.. 우리는 어디를 향해 걷고 있을까?
태양으로부터 여섯 번째 행성. 목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아름다운 고리 덕분에 태양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별. 토성의 영어 이름인 Saturne은 로마 신화 가운데 농경의 신 사투루누스에서 유래되었다. 태양에서 멀고 운행이 느려 늙은 신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레코드판처럼 가지런해 보이는 토성의 고리는 주로 얼음 조각과 덩어리들로 이루어졌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의 빈곤함과 황폐함.. 토성의 소나타를 들으며 언뜻 드는 생각. 로로스의 음악을 처음 듣고 많은 사람들은 광활하고 스산한 북유럽의 풍경을 떠올렸었다.
포스트록이라는 장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아이슬란드의 풍경에 대한 동경이나 상상을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학습된, 결과적으로는 빈곤한 상상력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음악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되거나 자극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로로스를 들으며 시규어 로스의 [헤이마]에서 볼 수 있었던 광활하고 푸른 아이슬란드의 평원을 상상하는 것은 팍팍한 현실을 순간 잊게 하는 고독하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랬었는데. 이건 뭔가 예측하지 못했던 전개다. 어느새 이어지는 트랙, 토성의 영향 아래.. 다시 토성을 생각한다.
나의 일상과는 무관하게 늘 그렇듯 빛나고 있었을 아름다운 별. 토성의 고리가 얼음 조각과 덩어리로 구성되었다는 깨달음은 비로소 찬란하게만 보였던 아이슬란드의 평원에 대한 재고로 이어진다. 외계인이 주조한 듯 우주적인 풍경.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북국의 평원은 실제 그곳에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겐 씨앗을 뿌려도 곡식이 자라지 않는 척박하고 황폐한 땅이었음을. 굶주린 사람들을 청어잡이 배에 태워 거친 바다로 떠미는 매정한 곳이었음을. 아이슬란드의 얼음과 토성의 얼음.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보였던 것들의 비정함을 깨닫는 순간, 청춘을 인생의 봄으로만 알았던 청춘들은 '서럽게 울면서' 떠밀리듯 유랑을 시작한다. Diaspora. 떠나는 사람들의 이동. 노오력을 퍼부어도 거둘 것이 없는 이 시대 청춘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끝끝내 펼치지 못한' 미완의 곡으로 남겨둔 채 걷는다.
멈출 수는 없으니 그냥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걷는 길은 다행히 혼자가 아니다. 불안하지만, 불안을 공유하며 함께 걷는 여로에서 그들은 서로의 마음속에 있을 곳을 마련하고 미처 꿈이라 부르지 못했던 가슴속의 이야기를 멜로디로 만들어 노래하기 시작한다. '깊은 한숨 머금은 꿈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다.' 비장한 합창이지만 그래도 여기엔 희망이 있다. '미처 끌어안지 못했던 희망 안고서 이 길을 걷는' 청춘들에겐. 여기까지가 앨범의 절반을 들으며 따라오는 상념들의 경로였다면,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는 듣는 분들의 몫으로 남긴다. 이어지는 회색빛 청춘의 고독, 무력감, 포기, 부끄러움, 가난의 어휘들.. 이것들을 단 한 번에 이어 직면할 자신이 없다.
나는 아마도 이렇게 자신이 없을 만큼 나타와 안정에 물들고 늙어버린 것이겠지. 불안한 시대를 사는 날카롭고 순수한 청춘의 송가를 차마 따라 부를 수가 없다. 나지막한 읊조림 뒤에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반전의 선율들 하나하나가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는 세상을 향한 광인의 몸짓처럼 느껴져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가 힘들다. 부러진 날개를 흔들어 대는 작은 새의 춤사위로 토성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매혹적이지만 춥고 황폐한, 슬프도록 아름다운 희망의 별, 토성까지..
- 윤성현 (라디오 P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