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STAGE. 사색하는 선율
'넌 버릇처럼 말하지 / 숨 쉴 곳이 필요하다고 / 욕심과 질투로 가득한 이 도시는 너무 답답하다고' ("비정체성") 영상을 보며 내내 생각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촬영 스태프들을 저 먼 섬 제주까지 훌쩍 떠나게 만든 건 어쩌면 이 노랫말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고. 온스테이지 '이호석' 편의 포문을 여는 노래 "비정체성"은 정규작으로는 4년 만에 발표하는 앨범 [이인자의 철학]의 첫 곡이기도 하다. 답답하다고,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이를 달래거나 부추기기는커녕 그저 가만히 듣고 조용히 관조하는 사람. '바라만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그만큼 힘이 되는 일인지를 아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평온이 가만히 스며든다.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씨 속 등받이도 없는 작은 의자와 어쿠스틱 기타 한대에 의지한 채 노래에 새겨진 무늬를 조심스레 짚어가는 그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위안이 드는 건, 아마도 그의 음악이 그런 사람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날과 달이 아닌 분과 초로 생각이 흐르는 요즘 세상에 '사색'은 사치다. 말과 글을 다루는 곳에서조차 누가 더 빠르게, 누가 더 자극적으로 쓰느냐가 주목을 끄는 세상에서 잠시 숨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자는 청은 시대에 뒤 떨어져도 너무 뒤 떨어졌다는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어(死語)'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이 단어는 하지만, [이인자의 철학]에서 가장 강렬한 생명의 신호를 보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앨범은 너무 오랜만이라 오히려 낯설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긴 시간 벼려진 문장과 멜로디가 한아름 담겨 있었다. 전작 [남몰래 듣기](2012)를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변화였다. '이호석' 2집이 아닌 '2기'라 해도 좋을 앨범 속 그대로인 건 타고난 차분하고 고운 성정뿐, 연주도 목소리의 결도 전과는 달랐다. 편안하지만 묵직했다. 쉽게 잡을 수 있는 종류의 균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은 사실이었다. 작업기를 통해 '존 맥스웰 쿠체'와 '장 폴 사르트르'에게서 느낀 지성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었다는 속내를 내비친 그의 앨범은 책과 싸운 날이 악기와 싸운 날만큼 많아 보였다. 곡 하나하나를 특정 작품과 연결한 그의 좀 더 섬세한 지침에 따르면, "비정체성"은 '지두 크리슈'나 '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관계"는 '변광배'의 "시선과 타자"와 함게 짝을 이루는 노래들이라고 한다. 많지 않은 말들로 구성된 노랫말은 아는 것이 그뿐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 거르고 걸러 살아남은 소수정예 인원이었던 것이다. 그를 담아내는 멜로디와 연주 역시 담백하기 이를 데 없다. 한정된 선율 사이로 가능한 많은 이미지를 욱여넣는 것이 능력이 된 현실 대신, 모두 덜어낸 자리 고심해 새로 담은 말과 생각이 천천히 흐른다.
제주의 바다, 제주의 곶, 제주의 가옥을 배경으로 촬영된 꽤나 다채로운 영상에도 불구하고 노래의 민낯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건 아마 그런 고집스런 바탕 때문일 것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섬 날씨 탓에 비바람은 몰아치고 악기는 젖어가지만, 그럴수록 소리는 물기를 머금고 더 진득하게 얽혀 든다. 극도로 제한된 셋 안에서 스미는 정제된 관능이 인상적인 "유체역학"과 빗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