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의 질서와 무일관성의 일관성. 부조화의 조화와 불안정의 안정.
지극히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
데카당 1집 [데카당]
‘데카당’의 데뷔 EP [ㅔ]를 처음 들었던 2017년 5월의 어느 날의 감각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나에겐 그 해의 가장 인상적인 음악을 마주한 순간이었으니까. 소울, 블루스, 싸이키델릭, 얼터너티브, 포스트펑크, 심지어 재즈 등 다채로운 음악적 요소들의 영향이 감지되는 사운드는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 한편으론 제법 단단하게 응집된 연주의 안정감을 함께 지니고 있었고 진성과 가성을 멋대로 넘나드는 엣지 가득한 보컬은 몹시도 자의적인, 그러나 동시에 시적인 은유들로 가득한 노랫말들을 흩뿌려댔다. 록 밴드의 외피를 걸치고 있으되 콕 꼬집어 그저 록 음악이라고만 칭할 수는 없는, 갖가지 장르들의 경계 위에 서서 전위적 스탠스를 취하며 여기에 적당한 치기, 냉소, 감수성을 더해 빚어낸 음악. 처음 데카당에게서 받은 인상이었다.
‘데카당’(Decadent).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네 사람, 진동욱(보컬/기타), 이현석(드럼), 설영인(베이스), 그리고 박창현(기타)으로 구성된 젊은 밴드로 2016년에 시작되었다. 라이브가 진원지가 되어 인디음악 팬들, 관계자들, 그리고 평론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2017년 늦봄에 앞서 언급한 EP [ㅔ]를 불쑥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단 네 곡을 수록한 이 초도작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들이-나를 포함해서-꽤나 많았지만 정작 본인들은 미처 하나의 음절조차 되지 못한 미완의 글자 ‘ㅔ’처럼, (그들 스스로의 기준에서) 결코 온전히 완성되지 못한 이 작품에 대해 늘 깊은-심지어 불만에 가까운-아쉬움을 표출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난 늘 이들의 첫 번째 정규작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도드라지는 개성과 재능,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분방한 태도, 동시에 이토록 집요한 갈망까지 지닌 이들이 “이게 우리야”라며 세상에 내놓을 만한 작품은 과연 얼마나 근사할지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ㅔ]로부터 꼭 1년, 이윽고 밴드의 이름과 동명의 첫 정규앨범 [데카당]이 긴 준비 끝에 마침내 조심스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총 열세 트랙을 담은 앨범은 가상의 이야기를 기준으로 1부, 2부로 나뉘어 구성되었는데 주인공인 화자가 ‘병’(거짓말, 편견, 아집, 혐오, 차별 등)이 만연한 바깥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켜 은신한 채 바깥의 기억을 되새기는 ‘안’의 이야기가 1부,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관찰해오던 화자가 이윽고 외출을 감행하면서 겪고 느끼게 되는 ‘바깥’의 이야기가 2부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강렬한 뮤직비디오로 먼저 선을 보였던 곡 ‘병’이 1부의 문을 연다. 전작인 ‘봄’의 연장선에 있는 곡으로 실제로 ‘봄’의 도입부를 교묘하게 차용하고 있기도 한, 쫀득한 그루브와 끈끈한 블루스가 공존하는 네오소울 풍의 넘버. 화자의 눈에 비친 바깥은 ‘여전히 날씨가 맑지 않다’. 타이틀로 낙점된 곡 ‘각주’는 밴드 초창기에 탄생한 곡 중 하나로 기억의 왜곡에 관해 이야기한다. 풍부한 선율 속 멜랑콜리한 라틴 바이브는 클래식기타의 영롱한 아르페지오가 더해지면서 한층 그 무드가 선명해져 마치 ‘산타나’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기도.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성과 이를 극대화하는 편곡으로 후반부로 향할수록 강렬하게 휘몰아쳐 짙은 여운을 남긴다. 스페인의 유명한 토마토 축제에서 이름을 빌려온 ‘라 토마티나’는 일종의 스킷이다. 보컬 진동욱이 다음 트랙인 ‘토마토 살인사건’의 노랫말 일부를-마치 과거 문인들의 시 낭송처럼-선창하면 나머지 멤버들이 후창하는 인트로성 트랙이다. 선명하게 뇌리에 남는 기타 리프가 인상적인 ‘토마토 살인사건’은 역시 데카당의 비교적 초창기 곡으로 꾸준히 라이브로 선보였기에 팬들에겐 익숙할 곡이다. ‘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노래는 베이시스트 설영인의 꿈 한 조각이 모티브가 되어 탄생했다. 락킹한 사운드와 스무스한 그루브가 공존하는 곡 ‘색채감각’은 옳고 그름에 대한 편협한 생각들이 잉태한 혐오, 차별에 대한 생각을 ‘색’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해 풀어낸다. 진동욱의 독특한 팔세토가 여유롭게 개성을 발하는 가운데 데카당 음악의 또 다른 매력인 시적 은유 가득한 노랫말의 매력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는 곡이다. 그루비한 리듬 파트와 긴박감 있는 기타 리프가 시종 경쾌하게 넘실대는 ‘살로메’는 브릿지와 종반부에서는 싸이키델릭하고도 헤비한 노이즈의 향연을 펼쳐내며 묵직한 반전을 안긴다. 역시 편협함에서 비롯된, 눈과 귀를 막고 이견을 외면하는 아집에 관한 얘기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작이다) ‘삭발’은 1부의 끝을 알린다. 화자는 바깥을 내다보고 눈을 마주친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은 그에게 ‘나오라’ 외친다.
스킷 ‘창’이 2부의 시작을 알리면 이윽고 2부의 첫 곡인 프로레시브 록 넘버 ‘외출’이 이어진다. 화자는 결국 ‘이불을 들추고’, ‘방문고리를 돌려’ 창 밖의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 모습을 그리는 노래는 다소 스산하고 황량한 분위기로 시작되지만 차츰 고조되며 이윽고 가슴 뭉클한 노스탤지어로 가득한 격정의 세계를 자아낸다. 그 여정의 끝에는 마침내 일망의 희망이 존재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 애잔하게 아름다운 곡이다. 싸이키델릭한 무드의 블루스로 연출되는 ‘산책’은 노래의 대부분을 단 한 구절의 가사 ‘걷자, 걸으면 돼, 걸음 좀 나아질 거야’의 반복에 할애한다. 막상 나와보니 여전히 ‘병’이 만연한 세상을 그는 일단 ‘걷고 또 걷는다’. 따스하고 미니멀한 사운드의 감미로운 네오소울 넘버 ‘피터파커’는 밴드가 처음으로 함께 만든 노래인 만큼 팬들에겐 무척이나 익숙할 곡이다. 심플한 선율과 코러스로 연출되는 인상적인 후렴구는 듣는 순간 단박에 뇌리에 꽂히는 힘이 있다. ‘일상의 비일상화’가 이 노래의 핵심 키워드로 화자의 눈에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사랑’이다. 2부의 끝 곡이면서 본작의 실질적인 마침표인 ‘B’는 끝내 도달한 이 해답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곡이다. 흡사 ‘앤써니 해밀턴(Anthony Hamilton)’의 음악이라도 듣는 듯 블루지하고도 격정적인 소울 발라드로 제목이나 곡 전반의 분위기에서 충분히 연상 가능하듯 전작 ‘A’의 연장선에 있는 곡이기도 하다.
한편 CD에만 수록된 곡인 ‘데카당’은 일종의 보너스 트랙이지만 사실 밴드가 이 앨범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하니 그 메시지가 궁금하다면 CD를 들어보길 바란다.
전작 [ㅔ]에서 느껴졌던 날카롭게 날이 선 개성도,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펄떡펄떡 약동하는 에너지와 자유분방함도 모두 여전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의 소리들은 더 단단히 응집되었으며 표현은 한층 세밀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졌다. 그저 매끈하게 듣기 좋은 소리를 얻고자 함이 아닌 ‘곡에 가장 적합하게 연출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편곡에 공을 기울이고 또 기울인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다. 더욱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를 창조하고 트랙들의 배열에 맥락을 부여함으로써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에피소드(트랙)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하나의 큰 이야기로 완결되도록 구성해냈다는 점 또한 이들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작품’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들을 가졌을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게 되는 부분이다.
밴드 스스로가 이야기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집요한 탐미주의와 여기서 비롯된 지극히 작가적인 태도, 앨범 [데카당]은 그들의 공통된 의식이 모여 만들어낸 일종의 정수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이미 밴드가 한 장의 EP, 한 장의 싱글을 발매한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아마도 처음으로 온전하게 그들 나름의 ‘완결’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것 또한 그저 ‘시작’일 뿐이려나.
-글: 김설탕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