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무에서 유로, 전례 없는 실험의 완성 - ZEEMEN KONSOLE - R E S E T EP
먼저 이 앨범을 이야기하기 위해 음악 시장에 일어나고 있는 두 가지 대표적인 현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나는 이른바 프리셋 시대다. 여전히 킥 소리 하나, 스네어 소리 하나에 신경을 쓰며 정성스레 음악을 만드는 장인들이 남아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 음악가들은 이제 장르를 불문하고 보다 편안하게 음악을 할 수 있다. 수많은 프리셋이 인터넷상에 있고, 약간의 돈과 검색 능력이 있다면 원하는 소스를 구해서 쓸 수 있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유행을 만드는 몇 가지 소리는 이 음악에도, 저 음악에도 계속 등장한다. 만드는 사람은 한 곡에서만 쓰더라도 20명이 만들면 20개의 곡에서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랩 음악 시장에서 목소리를 사운드 구성 중 하나로 쓰는 최근의 유행이다. 가장 선두에 나섰던 사람은 단연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이다. 트래비스 스캇은 곡을 만드는 데 있어 믹싱과 마스터링의 중요성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랩의 내용이 크게 의미가 없어도 괜찮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 결과 흔히 말하는 멈블 랩(Mumble Rap)이라는 신종 장르가 등장하고, 랩을 하는 목소리는 곡을 구성하는 소리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하나 정도가 되었다. 그게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멈블 랩은 목소리가 악기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줬으며, 그렇게 따지면 재즈의 스캣과도 비슷하다. 단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얼핏 장황해 보이는 이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지금 소개하는 [R E S E T]이라는 앨범은 이러한 현상 속에서 등장한 완전한 변종이기 때문이다. 우선 '지멘(ZEEMEN)'은 언더그라운드 테크노 음악가다. 리본 프로젝트(RE:BORN Project)를 비롯한 여러 기획에서 오리지널 트랙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서울에 있는 여러 클럽과 각종 대형 페스티벌에서 플레이를 해왔다. 그의 음악은 굉장히 남성적이며, 강렬한 이미지를 표출한다. 어둡고 무게감 있는 사운드스케이프, 거칠고 공격적인 진행은 지멘의 전매 특허다. 여전히 킥 소리 하나에 열정을 쏟는, 오리지널리티가 빛나는 음악가다. 반면 '콘솔(KONSOLE)'은 랩 음악가다. 2014년에 이미 트랩 음악의 공식을 완성하여 제시했고, 2015년에는 [MOD]를 통해 전자음악으로서의 트랩까지 이어나갔다. 그 뒤로 "Too Many Bottles", "YOU-OOH"를 통해 팝 음악으로서의 전환까지 이어나간 그는 음악 시장의 흐름을 누구보다 빨리 읽어냈고, 한국이 아닌 세계 음악 시장에 동시성을 맞췄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앨범 [R E S E T]은 말 그대로 두 사람 모두에게 리셋의 효과를 주는 작품이다. 테크노와 랩의 결합이라는, 아무리 찾아봐도 구하기 힘든 장르와 포맷을 만드는 데 있어 두 사람은 서로 응했고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어떤 선례도 없는 길을 결국 개척해냈다. 레퍼런스가 없다 보니 두 사람은 더욱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며, 말 그대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백지인 상태에서 처음부터 함께 만들어갔다고 한다. 그 결과 얼추 찾았을 때 나오는, 테크노의 소스를 활용하여 BPM을 변형한 랩 음악이라거나 하우스와 랩 음악의 경계와는 다른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탄생했다. 동시에 지멘 특유의 어둡고 과격한 전개, 그리고 콘솔 특유의 오토튠 활용과 라인 메이킹까지 두 사람의 장점이 모두 빛을 발하고 있다.
트랙별로 살펴보자면, 우선 1번 트랙 "R E S E T"은 극단적인 전개와 심플하면서도 매력적인 사운드 구성을 하고 있다. '콘솔'은 지금까지 만든 음악 중 보컬적인 시도를 가장 많이 한 곡이라고 하며, '지멘' 역시 끊임없이 긴장을 주며 타이트하게 밀어붙이는 트랙을 완성했다. 이어 등장하는 "Woo"를 이야기하며 콘솔은 "힙합 앨범 중 테크노의 소스를 가지고 힙합 BPM의 트랙을 만들어 랩을 했던 사례들은 많았지만, 그들과는 달라지고 싶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트랙은 그 자체로도 강렬한 테크노고, '지멘'의 의도대로 클래식 리듬 머신 소리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는 "원초적인 브레이크 비트 위에 내가 만든 애시드 베이스로만 작업했다"고 하며, '콘솔' 역시 그러한 구성에 부응하듯 좀 더 폭넓은 시야에서 멜로디를 만들고 코러스를 쌓았다. "Woo"의 후반부와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New Rhythm"은 개별 곡으로서의 매력도 살렸지만, 앨범 구성의 측면에서도 돋보인다. '지멘'은 하이햇 샘플 외에는 모두 신스로만 트랙을 만들었다고 하며, '콘솔'의 톤과 글리치함이 더없이 잘 어울려 두 음악가의 균형이 조화롭다.
이어 등장하는 "No Help"는 트랩 리듬의 트랙이며, '콘솔'은 "앨범이 전체적으로 리듬 베이스가 테크노 기반이였다면, 이 트랙만은 힙합 리듬을 베이스로 만들었다. 이런 트랙은 앨범에서 하나 정도 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지멘'은 "이 트랙은 디제이 튠으로 만들었던 테크노 트랙에서 리믹스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소스로 콘솔에게 트랩을 완성해주었다"고 하며, "No Help (Original Mix)"은 리드미컬한 트랙을 만들기 위해 퍼커션 샘플과 긴장감 있는 베이스로 클럽에서 디제이 믹스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트랙이라고 전했다. 이 트랙은 국내 로컬 레이블인 아마먼트(ARMAMENT)의 테크노 디제이 소설(SOSEOL)과 모자이크(MOSAIK) 크루의 디제이 노브(NOV)가 다른 느낌의 테크노 트랙들로 리믹스를 해주었다.
[R E S E T]은 아마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에 부합할 수도 있고, 예측을 크게 벗어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음악 시장에서 만나기 힘든 장르와 보기 힘든 조합이 주는 시너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며, 뻔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균형과 힘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한다. 전자음악과 랩/알앤비가 만나는 과정은 가끔 있었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내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무엇보다 작품 자체가 지닌 설명하기 힘든 매력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이다. 부디 이 음악을 알게 된 모든 이들이 다섯 트랙 모두 들어보고 또 즐기길 바란다.
블럭(칼럼니스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