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해' [개의 입장]
아주 개인적인 얘기부터 시작하자면, 음반을 판매하는 매장에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출근을 한다. 그 곳에는 제법 많은 외국인들이 오는데, 대부분 “코리안 인디”를 추천해 줄 수 있냐고 물어온다. 그래서 어떤 음악을 찾느냐고 물어보면 “듣기 좋은 사이키델릭”이라고 답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열거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종종 신중현이나 산울림 같은 이름도 등장하고, 맥 드마르코나 테임 임팔라처럼 지난 몇 년간 높은 인기를 누린 밴드/ 음악가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비슷비슷한 패턴의 질문을 꽤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서슴없이 정답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다렸다는 듯 1-2초 안에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앨범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적인 얘기를 처음부터 꺼내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앨범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이제는 (그런 질문에 대해)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앨범이 생겼다”였기 때문이다. 국적 불문하고 사이키델릭 팝이나 소프트 록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가 한국의 독립 음악의 최근작 중 무언가를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한동안은 이 앨범을 먼저 거론하게 될 것이다.
그 ‘앨범’은 술탄 오브 더 디스코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는 ‘G’ 혹은 파라솔에서 보컬과 베이스를 맡았던 ‘지윤해’의 첫번째 솔로 앨범이다. 앨범의 제목은 “개의 입장”. 앨범 첫머리에 “개의 입장(Intro)”를 두고 있어서 ‘입장’이 ‘식장이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감’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에 배치된 “개의 입장”을 듣고 보니 이 ‘입장’이 ‘어떤 테두리의 생각’이라는 의미다.
연결되는 구조나 이야기를 가진 컨셉트 앨범은 아니지만 이 곡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화자는 민들레 꽃씨에서 마법사로, 김박사에서 또다시 개로 바뀌지만, 이들은 대부분 혼자 남겨져 있거나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이다. 이 앨범이 만약 포크 레코드였다면 이 독백들이 그저 슬프게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렁이는 기타와 때때로 주도권을 가져가는 키보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리듬 등은 이들이 그저 꿈을 꾸고 있거나 언젠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도 하게 만든다. ‘사이키델릭 팝’이나 ‘드림 팝’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장르의 음악들은 환상의 세계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을 적당히, 혹은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주 상세한 내역까지 적어둔 스토리보드에 의거해 제작된 영상처럼 이 앨범에 등장하는 악기들은 매우 세심한 계획과 연출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들린다. 예를 들어, 살짝 열어둔 창문에서 들어오는 더운 공기 속에서 깼다 잠들었다를 반복하는 화자가 등장하는 “하나”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해 봤을 그런 시간의 감각이나 기분, 촉감 등을 미묘하게 변화하는 기타의 톤 안에 잘 담아두었다. 키보드와 베이스에서 만들어진 소리의 볼륨이 올라갈 때에는 꿈과 현실 사이 경계선을 통과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앨범을 시작하는 짧은 인트로 “개의 입장(Intro)”는 고전적 드라마의 과거 회상 장면에 의례 등장하는 플래시백(Flashback)을 상상하게 만드는 음악이다. 사운드의 질감이나 멜로디를 나열하는 속도가 현재보다는 과거의 감정을 향해 가는 것 같은데, 그래서 뒤이어 나열되는 곡들이 꿈이거나 지속적인 회상의 순간처럼 느껴진다. 앨범 전체를 듣고 나서, 처음으로 와서 이 음악을 들으면 더욱 더 그렇게 느껴진다. “괜히”의 공간,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골목길 풍광은 인트로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데 이런 곡들은 연주만으로도 어떤 이미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영화나 드라마의 성공 여부를 결정 짓는 핵심 요소들은 음악의 세계 속에서도 유사하게 존재한다. 요컨대, 잘 쓰는 것과 그것을 잘 실현하는 것이다. 연출, 즉 음악에 있어서의 연주와 편곡, 녹음 사이에는 능숙함과 자연스러움이 필요하다. 상당수의 영상물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듯, 많은 음악들도 이 능숙함과 자연스러움의 결과물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 앨범에는 누군가의 깊은 속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작사/ 작곡과 곡의 화자나 대상이 어디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혹은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명료하고도 세심한 사운드 디자인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앨범은 탁월하다.
이 앨범에 담긴 모든 곡의 작사와 작곡, 연주와 노래 모두 지윤해 한 사람이 해낸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걸 했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보다는 한 사람이 모든 걸 했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가사와 연주의 유기적 결합이나 일체감 같은 것들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각 수록곡의 가사나 흐름이 조금씩 다른데도 불구하고 이 앨범을 처음에 컨셉트 앨범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런 장점에서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앨범 제목에 등장하는 단어 ‘입장’이 처음 생각했던 그 ‘입장’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 단어가 ‘어디론가 들어간다’의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주어나 주체는 다르다.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한 싱어송라이터의 ‘입장’. 모두가 같이 지켜 볼만한 어떤 순간의 시작을 의미하는 입장이다.
김영혁 - 음악 기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