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미술가, 연기자, 감독... 그리고 다시 가수. ‘어어부 프로젝트’, ‘방백’의 백현진. 11년 만의 정규 앨범 [가볍고 수많은]
미술/음악/문학/영화 모두를 아우르는 아티스트 “백현진”.
2008년, 평론가들이 그해 최고의 앨범이라고 손꼽은 그의 솔로 앨범 [반성의 시간] 이후, “어어부 프로젝트”와 “방백”을 지나 솔로 아티스트로는 11년 만에 새 정규 앨범 [가볍고 수많은]을 들고 그가 돌아왔다. 장르를 넘나들며 최고의 연주자로 언급되는 “김오키(색소폰)”, “이태훈(기타)”, “진수영(피아노)”이 그와 함께 연주했다.
“저한테는 수정·개선·발전이란 게 없어요. 대신 변경·변화는 좋아해요. 그런 상태에서 얘기를 하자면 이제 어어부 시절의 ‘아름다운 ‘세상에’ 어느 가족 줄거리’ 같은 가사는 안 쓸 것 같아요. 그 노래를 부르는 것도 이제 힘들어요.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그리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던 게 기억이 나요. 그게 굉장한 폭력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이제 그런 일들을 안 보는 거죠. 저는 그런 일들을 안 본지 오래됐고, 그런 식으로 점점 변화해가는 거예요. 가사 말고 곡으로 넘어가면 분명히 변했죠. 하지만 그때보다 제가 뭐가 늘었다 얘기하는 건 사실 부질없죠. 멜로디를 만드는데 무리가 좀 없어진 거는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때는 작정을 좀 했던 것 같아요. 본때를 보여주겠다, 뭔가 다른 물건을 만들겠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물건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죠. 작정이 없죠, 뭐.”
11월 9일과 10일, 양일간 열린 [서울레코드페어]행사. 그 안에서 어어부 프로젝트의 [손익분기점] 바이닐과 백현진의 [가볍고 수많은] 시디가 동시에 공개됐다. 22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두고 있는 두 음반. 배우 트위스트 김과 인형 뽑기 기계의 수많은 인형 사진이 전면에 드러난 기묘한 두 음반 표지는 어딘가 닮아 보였지만 어어부 프로젝트 안의 백현진과 솔로 ‘가수’ 백현진은 긴 시간만큼이나 많이 변 해 있었다. 어떤 고정관념으로 사람들이 백현진을 보고 있는 동안 그는 쉼 없이 노래하며 변화했다.
기타리스트 방준석과 함께한 프로젝트 방백의 일원으로 인터뷰를 했을 때 백현진은 위와 같은 말을 했다. 22년 전 어어부 프로젝트의 백현진으로부터 지금의 백현진은 많이 변화했다며 한 저 말이 무척이나 기억에 남아 머릿속에 맴돌았다. 백현진 또는 어어부 프로젝트를 이야기할 때 함께 많이 거론되는 ‘불편함’이나 ‘위악’ 같은 낱말은 이제 거의 흐릿해 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일부러 청중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들지도 않고 표현도 하지 않고, 그런 것에 쾌감을 느끼던 행위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누군가에게 힘이 됐으면 하는 노래를 부르고, 애틋한 연가를 부르기도 한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노래를 만들기보다 ‘가볍고 수많은’ 일상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노래하기 위해 그는 김오키(색소폰), 이태훈(기타), 진수영(건반)과 함께했다. 지금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연주자들이다. 2018년 봄부터 맞춰온 합은 2019년까지 이어졌다. ‘백현진 밴드’는 그동안 수없이 함께 연주하고 곡을 다듬었다. 활동은 열정적인지만 연주는 차분하다. 연주자들의 이력이 주는 격정이나 열정의 이미지와 다른 정적이고 아련한 느낌을 주는 연주 위에서 백현진의 목소리는 또 한 번 새롭게 들린다. 더 이상 그는 과하게 목소리를 뒤틀지 않지만 연주에 어울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노래에 몰입하게 한다. 누가 뭐래도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섬세하고 깊다. 그리고 앞서 그를 솔로 ‘가수’라 표현한 것처럼 이제 충분히 대중적이다.
보컬리스트 백현진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건 그가 굉장히 뛰어나고 성실한 창작자란 사실이다. 이 ‘사실’은 이번 앨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솔로 음악가로서 [반성의 시간](2008)을 발표한 이후 [찰라의 기초](2011), 어어부 프로젝트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2014), 방백 [너의 손](2015)처럼 주기적으로 창작 작품을 발표해왔다. 그 앨범들이 하나같이 훌륭했음은 물론이다. 백현진은 작사가로서 자신의 마치 단편영화 같은 일상의 풍경과 세부적인 표현을 써 노랫말을 완성했고, 작곡가로서 여기에 맞는 곡을 만들고, 보컬리스트로서 이를 표현해왔다. 하지만 그동안 백현진을 드러내 온 건 보컬리스트 또는 퍼포머 백현진이었다.
[가볍고 수많은]을 통해 창작자 백현진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가령 ‘빛’ 같은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짜릿함을 생각해본다. 연주를 듣는 즐거움, 연주와 보컬이 한 몸처럼 함께 호흡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즐거움, ‘스미다’와 ‘머물다’라는 정서적인 부분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곡을 접할 때의 즐거움이 ‘빛’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감히 ‘올해의 노래’라 해도 좋을 만큼 즐겁고 신선하고 감각적이다. 이는 엄연한 ‘대중’가요다. [가볍고 수많은]엔 이런 반짝이고 번뜩이는 순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곧 듣는 즐거움으로 연결된다. 보컬리스트로서, 창작자로서 40대 후반의 백현진은 이렇게 또 한 번 자신의 경력을 갱신한다.
앨범의 마지막 곡 ‘고속도로’가 앨범의 설명하는 노래처럼 들린다. 앨범에는 ‘고독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상실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연민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노래의 화자가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며 90년 전의 노래를 들었던 것처럼, 이제 백현진의 ‘가볍고 수많은’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함께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들을 수 있는 노래다.
- 대중음악평론가 “김학선”, 백현진 [가볍고 수많은] 라이너노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