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자의 서정적 연주. 'Sumin Jung(정수민)' – [Neoliberalism]
- 낯선 청춘 최규용
작곡자와 연주자는 음악으로 자신의 삶과 생각을 표현하는데 능력을 지닌 자이다. 사실 음악은 언어보다는 훨씬 더 추상적인 면이 강하다. 그래서 개인의 사고를 표현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 실제 음악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교육이 필요하지 않던가?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음악을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음악은 늘 세상과 관련을 맺어왔다. 많은 작곡가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영감을 받아 곡을 쓴다. 재즈 연주자들의 즉흥 연주는 그 순간의 분위기, 연주자가 위치한 시공간에서 비롯되곤 한다.
더 나아가 보다 직접적으로 사회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음악으로 풀어내려는 작곡가나 연주자도 있다. 다른 동료들이 사랑, 이별 등의 보편적이고 추상적 감정의 표현에 집중한다면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사건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재즈 연주자들 중에서도 정치적, 사회적인 관심을 드러낸 사람들이 꽤 된다. 특히 흑인 연주자들이 많다. 아무래도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기에 종교적이다 싶을 정도로 추상적인 구도의 길을 걸었던 존 콜트레인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인권 운동에 동조하는 마음으로 ‘Alabama’를 작곡한 것, 빌리 할리데이가 인종 차별에 대한 비탄의 마음으로 ‘Strange Fruit’을 노래했던 것, 이와 유사하게 니나 사이먼이 ‘Mississippi Goddam’, ‘Four Woman’ 등의 노래를 부른 것, 베이스 연주자 찰스 밍거스가 아칸사스 주지사의 인종 차별을 조롱하며 ‘Fable of Faubus’를 작곡한 것, 드럼 연주자 맥스 로치가 흑인 인권 운동에 대한 동조의 의미로 앨범 <We Insist!>를 녹음한 것이 좋은 예이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베이스 연주자 정수민의 첫 번째 앨범 [Neoliberalism]도 연주자의 사회 참여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앨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베이스 연주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았다. 신자유주의는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곤란한 개념인데 그래도 거칠게 정의하면 자유방임 시장 경제를 선호하고 이를 위해 정부의 규제를 축소하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통한 경제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만 실제 현실 적용 단계에서는 사회적 평등을 약화시키고 빈부차이를 늘린다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정수민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한정되어 있는 자본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는 한국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두 곡으로 이루어진 ‘Neoliberalism’를 작곡하고 연주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강남 478’은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곡이다. 이 곡의 제목은 서울시 강남구 양재대로 478번지를 의미한다. 이 곳에는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 마을이 있다. 올 해 철거를 앞둔 이 마을은 그 동안 재개발과 그로 인해 터전을 잃는 도시빈민층의 반발로 이런저런 화재를 모았다. 한편 구룡 마을 인근에는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사회의 경제적 양극화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정수민의 곡은 바로 이 대조적인 풍경을 그린다.
한편 후반부에 배치된 두 곡의 ‘Socialism’은 “신자유주의”의 폐단에 대한 해결책을 국가 통제를 통해 평등과 분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정수민의 생각을 반영한다. 그렇다고 베이스 연주자가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사회주의”가 지닌 어둡고 공포스러운 부분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정수민의 생각은 어떻게 음악을 통해 표현되어 있을까? 하지만 사실 책 한 권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극화 현상을 단 몇 곡으로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음악의 언어는 추상적인 것이어서 그대로 감상자에게 창작자의 의도가 전달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연주자의 손을 떠난 음악은 감상자에 따라 다르게 수용될 수 있다. 나만 해도 앨범의 주제를 접했을 때 매우 급진적인 성향의 프리 재즈나 아방가르드 재즈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 넓게 보면 진보적 성향의 재즈라 할 수 있지만 하나의 스타일로 정의하기 어려운 음악이다. 복잡한 관념의 해설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한 연주자의 감상이 우선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감상은 안타까움으로 귀결된다.
‘강남 478’이 대표적이다. 양극화된 우리 사회를 그리고 있다고 하지만 음악은 극적인 대조가 아니라 아련한 멜로디가 주를 이룬다. 주제를 모른다면 사랑의 이별이나 그 슬픈 추억을 그린 곡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서정적이다. 그렇다면 정수민이 자신의 생각을 음악으로 제대로 옮기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반대로 베이스 연주자는 우리가 경험한 사랑의 이별이 주는 회한(悔恨)이나 구룡 마을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도시빈민층의 상황이나 정서적으로는 통한다고 말하려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우리는 그 상황을 안타까워하지만 그 부조리함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참여할 생각을 감히 못한다. 결국 타인의 고통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나 소설 속 현실로 등장한다면? 그 상황에 몰입된 나는 가상의 현실임에도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분개할 것이다. 정수민 또한 바로 이점을 생각했다. 그래서 부(富)와 빈(貧)의 대치적 상황을 그리기 보다 그것이 주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Neoliberalism’도 마찬가지다. 두 개의 파트로 이루어진 이 곡은 정수민의 베이스 솔로와 이에 반응해 자유로운 연주를 펼치는 이선지의 피아노로 시작된다. 두 악기 모두 음의 선택이나 배열에 있어 강한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그대로 신자유주의의 폐단으로 인해 와해되고 혼란스러워지는 사회를 상상하게 한다. 우리가 사회 뉴스를 보며 어지러움을 느끼는 상황을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연주한 것 같다. 특히 ‘Neoliberalism 1’의 중반부와 ‘Neoliberalism 2’의 도입부에 들리는 저음과 고음이 교차되는 베이스 연주는 상여 길의 종소리를 의도한 것으로 정수민이 “신자유주의”와 우리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리는 장치이다.
‘Neoliberalism 1’이 표현주의적으로 흘렀다면 ‘Neoliberalism 2’는 다시 다시 정서적인 연주로 돌아간다. 불평등 속에 사회의 변두리로 몰리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측은함, 절망감 등이 정수민의 비감 가득한 베이스 연주와 이에 대한 감정을 고조시키는 이선지의 피아노, 여기에 두께를 더하는 박정환의 드럼을 통해 드러난다.
‘Socialism’에서도 정수민이 중심이 된 트리오는 정서 중심의 연주를 펼친다. 그리고 그 정서는 우수가 지배한다. 특히 ‘Socialism 1’에서 슬픔을 안으로 머금은 듯한 이선지의 피아노가 살짝 뒤로 물러선 뒤 이어지는 정수민의 묵직한 베이스 솔로는 가슴 뭉클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수민이 사회주의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묵묵히 시간의 흐름을 표시하다가 ‘Socialism 2’로 넘어가면서 강력한 파괴력을 드러내는 드럼과 ‘Socialism 1’에서 이어받은 테마에 잔뜩 긴장을 불어 넣은 피아노와 베이스 연주는 결국 “사회주의” 자체는 우리 현실의 답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Socialism 1’의 연주가 낭만보다 우수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리라. 심각한 자유 경쟁 중심의 사회에 대한 반발로 국가의 통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 또한 아닌 것 같아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사실 베이스 연주자가 사회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제시할 의무는 없다. 관심을 갖고 어떤 변화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무겁고 어려운 주제의 곡들이지만 음악 자체가 주는 느낌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별한 마음의 준비 없이 들을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느낌을 표현한 보통의 곡들과 차이가 없는 곡과 연주다. 바로 이 부분이 나는 이 앨범의 가장 큰 미덕이라 생각한다. 정수민은 사회 참여적인 마음으로 곡을 쓰고 연주를 하면서도 음악은 기본적으로 정서적인 것임을 잊지 않았다.
사실 빌리 할리데이, 존 콜트레인, 니나 사이먼, 찰스 밍거스, 맥스 로치 등의 사회 참여적 음악이 지금까지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음악 안에 담긴 전언(傳言)만큼이나 음악 자체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영어를 모르고 작곡의 유래를 모를 지라도 가슴에 무엇인가를 남기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곡이기에 내 마음을 움직일까? 하는 마음에 음악을 들은 후에 유래나 작곡 동기를 찾게 만드는 힘.
정수민의 이번 앨범도 음악 자체의 순수함으로 감상자의 마음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꼭 구룡 마을에서 들을 필요는 없다. 두꺼운 사회 서적을 읽으며 듣지 않아도 된다. 늦은 밤, 홀로 어둠 속에서 이 앨범을 들어보라. 그 고요하고 고독한 공간에 음악이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림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감상이 아닐까 걱정하지 말자. 결국 서정적인 연주를 들으며 우리의 삶과 주변을 다시 생각하게 될 테니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