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노래
[김일성이 죽던 해] 천용성의 2020년 신작 '중학생' 그리고 '분더바'
― 라이너 노트
"열다섯, 스물다섯, 쉰다섯 애어른의 무기력 관찰기" ― 정병욱(대중음악평론가)
용성이에게 라이너 노트를 부탁받았다. 라이너 노트를 쓸 사람으로 중학교 동창 중 유명한 사람을 골랐다고 한다. 우주 대스타 천우희보다는 덜 유명한 사람으로. 미안해, 용성아. 네가 나보다 100배는 더 유명해. 대신에 내가 아는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생생히 기억나지. 중학생 용성이. 요즘은 그 시기가 훨씬 빠르다지만 원래 세상만사 다 알 것처럼 내 머리가 제일 커지는 시기는 중학생 시절이 딱이다. '중2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키가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였던 용성이다. 그저 친구들이랑 농구 하는 게 인생의 낙이었던 내가 방과 후 농구 한 판 하고 난 뒤 조그만 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정리하고 있으면, 도서부원도 아닌 그가 어느새 와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있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쟤 중학생 맞나?
천용성이 좀 그렇다. 그는 일찌감치 애늙은이 같은 사람이었다. 지난해 인디신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던 정규 데뷔작 타이틀만 봐도 그렇다. [김일성이 죽던 해]. 그해에 우리는 고작 여덟 살이었고, 앨범에는 우리 또래의 취향보다 십수 년은 앞설 법한 1990년대 작가주의 가요풍이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다. 음악의 기조는 이번에도 유지된다. 정규앨범에 “순도 1,000%”라는 홍보 문구로 패러디된 브로콜리너마저 류의 순도 높은 인디팝 감성은 노래 ‘중학생’으로 이어지고, 10년, 20년도 아니고 무려 반세기는 거슬렀을 법한 투박한 컨트리풍 악곡과 연주가 ‘분더바’에 담겼다. 동시에 이 노래들은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고 있기도 하다. 머리가 크고 지식이 늘어나 세상 돌아가는 거 이제 다 알 것 같았는데, 막상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하겠다는 중학생 천용성과 성인이 된 천용성의 시선이 두 이야기를 통해 교차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들이 온전히 그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가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노래들은 모두 ‘무기력’에 관한 이야기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인 ‘중학생의 나’는 이유 없이 “밥맛도 없고” “친구들도” “노는 것도” 그냥 그렇다. “좋았던 친구”도 점점 멀어지고, “세상의 예쁜 것”들은 모두 거짓이라는 생각이 든다.(‘중학생’) 성인이 되어 마주한 무기력은 그 이유가 더욱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분더바’는 2014년 연희동 모처에 전 재산을 마련하여 카페를 차렸다가, 건물주의 계약 해지 및 이에 대한 강제집행으로 고작 7개월 만에 거리에 나앉게 된 50대 부부의 사연을 그린 노래다. 당시 임대차 분쟁으로 농성 중인 현장에서 마음에만 품고 미처 노래를 완성하지 못했던 천용성은, 2018년에 궁중족발 농성 현장에서 이 곡을 만들었다. “분하지. 더럽지. 바뀌는 건 하나 없지.” “자, 그럼 해산”. 카페 이름으로 만든 삼행시로 운을 띄우고 저들의 말로 음악을 닫는 노래에는, 법원 집행관과 용역직원 70명에 의해 1시간 만에 종료된 강제집행 앞에서 그저 무기력하기만 했던 이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무기력의 근원은 주로 트라우마다. 무언가를 간절히 열망하고 지키려 했지만, 결국 얻지 못하거나 잃게 되고 마는 상실의 기억과 경험은 새로운 희망과 행동의 모색을 가로막는 법이다. 닳고 닳은 경험을 통해 이는 더욱 강화된다. 노래가 담아낸 천용성의 경험은 중학생 시절과 대학생 시절, 20대 시절과 30대 시절이 혼재되어 있다. 절대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자신의 경험만으로 강한 무기력감을 느끼기에는 아직은 젊은 나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친구가 따돌림을 당하는 모습, 나 아닌 다른 이가 강제집행을 당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스스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마냥 슬퍼하며 무기력을 경험했다. 그리고 열다섯, 스물다섯, 쉰다섯의 나와 타인을 오가며 경험치를 더한 한 어른의 경험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그만의 목소리로 대변됐다. 자신의 유년기 시절을 박제했던 지난 앨범의 커버는 자연스럽게 망원경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으로 교체되었다.
‘중학생’을 부르는 천용성의 나른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매가리가 반쯤은 더 없는 것 같다. 인트로와 코러스를 함께 한 임주연의 존재가 없었다면, 후킹한 멜로디 라인과 유려한 기타 솔로라도 아니었다면, 이 곡의 제목은 ‘중학생’이 아니라 ‘휴가에서 복귀하는 이등병’이나 ‘노인’이 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분더바’는 천용성의 곡 중 유독 낮은 음정으로 불렸다. 목을 한껏 눌러 부른 발성에서는 피해자의 억한 심정과 가해자의 무감정이 함께 느껴진다. 동시에 소울 넘치는 컨트리 기타 리프와 베이스의 그루브가 삼행시 가사와 더불어 블랙유머스러운 분위기도 풍긴다. 그는 그렇게 앨범에 이중적인 무기력을 표현했고, 음악을 받아 들은 나는 그가 전파한 오묘한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사흘을 골골대야 했다.
용성이가 음악을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된 후 뒤늦게 공연장을 찾아갔지만, 굳이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인생 얘기를 들어보는 일 따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저 청취자로서 들어본 그의 음악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 그대로구나.’ 사실 천용성의 음악은 풍성하고 세심하게 매만진 그 완성도와 무관하게 낡은 향수를 근력으로 삼는 게 사실이다. 노래나 연주 등 퍼포먼스는 아직 한창 성장 중이다. 그러나 일찌감치 커버린 키처럼 세상과 주변을 멀리 보는 시야 만큼은 여전히 남부럽지 않게 앞서가는 그다. 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예민함과 공감 능력은 물론, 친구들에게 한 마디씩 툭툭 내던지던 솔직함과 유머, 날카로움 역시 그대로다. 타고난 시인이나 예술가라는 게, 2020년 대한민국 버전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게 멀리 있을까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