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 천 킬로그램의 나, 천 겹의 나
‘나의 생각은 다른 누구도 밀지 못할걸’
신세하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재미가 있다. 그네를 타듯, 시소를 타듯, 침착하면서도 묘한 생기가 도는 음악이 주는 재미. [1000]은 그 음악적 재미를 극대화한 동시에 아주 구체적인 대상에 몰입한다.
이번 앨범에서 느슨한 리듬을 집요하게 채우는 소리와 말들은 모두 ‘나’를 향한다. 타이틀곡인 [1000]은 그 대표격이다. 이 곡과 수록곡인 [나Na] 두 곡의 리드보컬로 참여한 엄정화의 존재감은 단순한 피처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중은 물론 수많은 후배 가수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여성 가수로서 꾸준히, 또 새롭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엄정화가 발화자로 나섬으로써 [1000]은 신세하라는 뮤지션 개인을 넘어서 더 크고 많은 ‘나들’을 대변하길 시도한다. 유연하고도 탄력 있는 보컬의 매력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이 곡은 ‘1000’이라는 키워드로 나를 선언한다. 많은 양이나 액수를 말할 적 쓰이는 숫자 100이나 10000 대신 등장한 1000은 다름아닌 ‘무게’다. 아무도 ‘밀지 못하는’ 묵직한 나의 생각. 고집스러운 의지를 산뜻하게 해석하는 음성은 밀리지 않는 나와 나 사이의 해독불가능성을 경쾌하게 노래해 버린다. 동시에 이 경쾌함은 주술처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반복되며 마법 같은 힘을 획득한다. 오랫동안 노래해온 목소리, 의연한 어른 여자의 목소리, 많은 이들이 길게 사랑하고 교감하고 내 것처럼 여기던 바로 그 목소리에 실리는, 마법 같은 힘.
앨범에는 신세하의 장점과 특기가 촘촘히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장점이자 특기는 역설적이게도 ‘덜 하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것이 분명한데도, 할 줄 안다고 해서 다 진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듣는 사람들은 그가 가만가만 꺼내는 소리의 높낮이에서 내용에서, 말씨에서, 접속사에서 저력을 가늠한다. 번역되지 않는 말들은 번역되지 않는 그대로 꺼내고, 일상적-시적-음악적 어휘는 아무렇지 않게 교차한다. ‘할 걸’ ‘같아’ ‘듯해’ ‘일지 몰라’ 같은 표현을 써서 조심스럽게 말을 잇지만, 그 어조만큼은 단호하게 유지한다. 소리들은, 그리고 말들은 근사하느라 부자연스러워지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꼭 진작부터 소파에 앉아서, 책장에 꽂혀서 기다리고 있던 것 같은 노랫말은 공들여 설계된 사운드와 마디마디 꽉 맞물려 독특한 맛을 만들어낸다.
[1000]의 수록곡을 천편일률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특징을 갈무리한다면 ‘모순형용을 논리로 만드는’ 곡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00]은 수많은 부딪힘과 불확실함 사이에서 도리어 명쾌해지고 튼튼해지는 마음을 들려준다. 앨범은 부딪히고 흐려지고 불확실한 것이 실은 당연한,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지지할 수밖에 없는 주체이자 대상인 ‘나’를 이야기한다. ‘나’는 변색되지 않는, 단단하고 투명한, 화강암 사이에 감춰져 있을지언정 반짝거리는 크리스탈이면서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연약하고 물컹한, 그러나 환경이 아닌 기분에 따라 스스로의 색을 결정하는 도마뱀이기도 하다. 비워내기 위해 불러모으고, 겁나는 마음을 레이더 삼아 그리운 사람을 찾아내는 나. 겁을 내고 질투하는 나, 이해할 수 없는 나, 숨어있는 나. 그런 나를 발견하고 응시하고 받아들이는 여러 ‘나’들의 소리가 포개지고 덧대어지는 [1000]의 세상은 듣는 사람에게 기이하고도 벅찬 공감과 끄덕거림을 불러일으킨다. 그 공감은 곧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이고자 하는 마음, 그리하여 나의 틈과 흠을 절망이나 염세 대신에 개성이자 자신감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도약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전의 신세하를 들으며 상상했던 세계는 이번 앨범에서 기대를 반영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확장됐다. 재미나고 신중한 소리들, 위트와 리듬감, 축축한 자맥질과 모래바람 같은 공회전을 오고가는 사운드스케이프의 결합은 [1000]만이 주는 감각적 경험을 완성한다. 겹과 겹 사이, 층과 층 사이, 씨실과 날실 사이, 골목과 골목 사이의 빈틈처럼, 틈 사이를 메우는 공기마저 소리 없는 데의 소리가 된다.
‘불러모아’ 쌓아올린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같은 앨범 안에서 만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들이 만드는 화학작용이 남다르다. 나‘들’이 되어 앨범을 한층 다채롭게 채운 모과Mogwaa, 김문희Munhui Kim, 콴돌Quandol과 엄정화Uhm Jung Hwa, NTsKi, 김아일Qim Isle, 오존O3ohn, 민제 Minje, hahm의 활약은 [1000]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노래를 들으면서 할 수 있는 일, 하게 되는 일 중 하나가 결국 ‘내 생각’이라면, [1000]은 아마 ‘내 생각’을 위한 가장 독특한 앰비언스이자 주선율이 되어줄 것이다.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를 순서대로 듣다 보면, 좋은 대화를 나누고 집에 돌아가는 길 버스 창문에 기대어 느끼는 마음 같은 것이 찾아온다. [1000]은 구체적인 나를 얘기하는 것이 실은 구체적으로 다른 이들을 호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1000]에는 넘어지지 않는 1톤짜리의 ‘나’들이 공명하는 음성이, 그 틈에서 예기치 못하게 발견되는 ‘우리’의 반짝거림이 속살거린다. 우리는 여기에 있고(We’re here for you) 이 음악은 너이기도 나이기도(아마 이 음악은 너일걸/네 단어를 담아//아마 이 음악은 나일걸/내 겁을 담아)하다. 단단한 마음이 고독한 마음인 것은 아니다.
김송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