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아시안 맨 (Secret Asian Men)' [Shade Of Us]
당신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때 이른 단풍색 긴 자켓을 걸치고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 사람, 당신이 분명하다고. 그러나 이내 수챗구멍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지하철 출구 아래로 사라져 버린, 실은 당신이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당신.
벌써 긴 옷을 걸치기엔 덥지 않느냐고 묻는 내게 매번 당신은 말했었다.
“더워. 덥지만 가을이잖아.”
반팔을 고집하다 낮 밤으로 차가워진 기운에 기어코 감기를 걸리고, 그제서야 옷장 깊숙한 곳에서 긴 옷을 꺼내던 나는, 당신을 만나고부터 당신이 정의해 준 그 날의 계절을 살아갔었다.
골목 안쪽을 파고드는 나무 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있을 때, 해는 이미 단호하게 등을 보인 후였다. 어스름이 서울 성곽의 면면마다 스며들고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음악이 새어나왔다. 시야가 어두움에 침잠 될수록 청각은 예민해졌다. 바람이 귓바퀴를 바쁘게 두드렸고, 나뭇잎은 무리들 사이에서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풀숲에 몸을 숨긴 귀뚜라미 군중들의 목소리. 나는 일순간 걸음을 멈추고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뺐다. 음악에 섞여 들어온 자연의 소리들이 이어폰에서 들리는 소리일까 진짜일까 하는 의구심에서였다.
‘스미다’라는 말에도 반대말이 있을까. 스민다는 말에는 아픔이 없다. 상처를 비집고 들어오는 억지스러움이 없다. 당신과 나를 사랑으로 정의한 그 다음 날부터 당신은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내게 흘러 들어왔다. 당신의 곰살맞은 물건들은 작은 손가방에 담겨져 내가 사는 집 안 곳곳에 놓여졌고, 나는 당신의 성긴 습관들 사이사이를 채워 넣는 일에 점점 익숙해졌다.
늦은 저녁,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밝게 불이 켜진 방 안엔 침구들 사이에 뒤엉켜 잠든 당신이 있었다. 나는 이불을 펼쳐 당신을 감싸고 집 안의 조도를 낮췄다. 그 모든 일들, 식탁 위에 당신이 먹고 냉장고에 넣어 놓지 않은 우유와 눅눅해진 시리얼 봉투를 수습하고 말라 붙어있는 그릇을 물소리를 죽이며 씻어내는 일들이 모두 당신을 향한 사랑임을,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성곽과 나란히 걸으면 그 끝은 성곽을 관통하는 구멍으로 이어졌다. 구멍을 안으로 파고들자 일순간 시야가 멀리까지 트였다. 도심을 에두른 성곽길 속에 서울이 나직하게 고여 있었다. 어둠 속에 잠식된 도시를 바라보는 동안 심장 박동에 맞춰 고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심장이 내 안에서 계속 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자주 잊어버렸다. 내가 만들어 내는 거친 호흡소리가 마치 당신을 상실한 그 날의 내 울음소리 같아서 나는 서둘러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닿지 않을 만큼 멀리 있는 도시의 불빛들은 점점 흐리게 흐리게 번져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 샤워를 할 때 무슨 이유인지 샤워부스 안에 물이 고여 들었다. 수면이 발목까지 올라와서야 나는 허리를 굽혀 막혀있는 수챗구멍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곳을 막고 있는 당신의 머리 끈 하나를 들어올리자 그제야 고여있던 물이 소용돌이치며 어두운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미는 것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아픔이 없는 자연스러운 분리를 뜻하는 그 말을 끝내 당신은 알려 주지 않았다.
그 날을 우리의 이별의 날로 정의한 당신에게, 나는 시간이 늦었으니 날이 밝아지면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버스도 지하철도 더 이상 다니지 않을 시간이었다.
“늦었지.”
당신은 말했다.
“늦었지만, 우리는 헤어졌잖아.”
당신은 야무지게 가방 안에 자신의 물건들을 챙겼지만, 그 작은 가방 안에 모두 담기기엔 이 곳엔 너무 많이 당신이 묻어 있었다.
샤워기에서 다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스미는 당신 / 한다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