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탁' [TERMINAL EP]
올해 초 싱글 두 곡을 발표하며 성공적인 복귀전을 치른 건탁이 EP를 발매했다. 전작 '해사냥' 이후 4년을 꽉 채우고도 흘러 넘친 공백이다.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번 앨범은 여러 면에서 그 밀도가 상당하다.
전주도 없이 시작하는 1번 트랙 '악어'는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비트가 전체를 관통하는데, 뻔한 기법을 구성적인 아이디어로 극복한 재치가 돋보인다. 가사와 멜로디의 싱크 또한 깔끔하다. 세련된 감각의 블루스 팝 넘버이자 앨범과 동명 타이틀인 'Terminal'은 반복적인 후렴구와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귓가를 오래도록 맴돈다. 이어지는 '동백'. 단연 이 앨범의 킬링 트랙임을 자부한다. 감상하는 내내 어느 한군데 흠잡을 구석이 없는 이 곡은 제목만큼이나 사무치게 아름답다. 꼭 들어 보시길. 싱글 커트 되었던 'Teminal'과 '동백'은 리마스터를 거쳐 좀 더 견고한 사운드로 앨범에 수록 되었다. 이어서 경쾌한 신디사이저와 기타 리프로 청량하게 환기 시키는 Hollywood 를 듣다 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색다른 스펙트럼이 느껴진다. 바버렛츠 출신 박소희의 벨벳 같은 음성이 곡에 풍성함을 더했다. 비장한 퍼즈 기타로 일관하는 'Cable Car'는 후반부의 반전이 백미이며 마지막 트랙 'Esmeralda' 에서는 스트레이트한 편곡 위를 목소리 하나로 질주하는 진솔하고 담백한 한 남자가 보인다.
전작에 비해 면면이 확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번 앨범은 특히 명료한 사운드 디자인과 보컬 편성에서 테마에 대한 높은 집중도를 보인다. 공백기 동안의 고민과 방향 설정을 짐작게 하는 부분이다. 가사 또한 좀 더 도회적이고 구체적인 소재를 다룸으로써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전달하려 한듯하다. 뿌리를 깊게 내린 넓은 외연의 앨범이다. 여러 장르를 추구하는 아티스트는 많지만 다양하게 표현 하는 이는 생각보다 드물다. 개성 강한 싱어송라이터들의 전국시대임을 알리는 뮤지션이 또 한 명 나왔다.
1. 악어
지옥은 피해자가 많은 곳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별 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비롯된 절망과 괴로움의 탈출구로서, 나도 모르게 그 누군가가 되고 싶어했던 적은 없었는지 한번쯤은 자문해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일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일이라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럴만한 힘과 기회가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 상처주지 않고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먹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알고 싶지 않은 소식들이 유난히도 많이 들리는 요즘입니다. 옳은 길과 쉬운 길 중 옳은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 같은 노래가 되었으면 합니다.
2. Terminal (Remastered)
돌이켜보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얻어냈던 것들 중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이번엔 다르겠지 했던 기대도 결국 또 추억이 되는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정해진 과정대로 그저 여행을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순간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터미널’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렇게 무언가에 떠밀려 계속 어디로든 나아가야만 했고, 또 그래야 하는 딜레마와 상실감에 대한 곡이에요. 방향을 잃고 속력만 남아버린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 가사 중 ‘높이가 다른 웃음소리’는 서윤후의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에 수록된 시 퀘백의 구절 ‘우리는 단지 조금 다른 높낮이의 울음소리를 냈다’에서 원작자의 동의 하에 차용하였습니다.
3. 동백 (Remastered)
고금의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 동백꽃에 대한 제 나름의 설화를 지어보고 싶었어요. 눈에 띄게 아름다운 꽃인데 볼 때마다 늘 처량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 외로움일거라 단정지었습니다. 나의 간절함이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채플린의 말처럼요.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잖아요.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혼자 살지 않는 한 오해는 어떻게든 생기는 것 같아요. 손 댈 수 없을 만큼 쌓여 버린 오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보면 그저 절절한 사랑 노래이기도 해요.
4. Hollywood (Feat. 박소희)
주어진 캐릭터 바로 그 자체가 되는 것. 흔히 얘기 하는 훌륭한 연기이자 배우라고 하죠. 우리의 삶은 영화가 아닌데 꽤 자주 좋은 배우가 되길 강요 당하는 것 같아요. 나의 개성은 베개 밑에 두고서 사소한 옷차림부터 말투, 마음 가짐까지 제시된 기준에 맞게 바꿔 내야 훌륭한 인재가 되고 번듯하게 살 수 있는 건가 싶은 일상을 자주 마주 하게 됩니다. 경쾌한 곡에 이런 서글픈 가사를 붙이는 악취미도 어쩌면 그래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훌륭한 목소리를 빌려 주신 박소희님께 감사드립니다.
5. Cable Car
한강변 산책을 종종 하는데 그때마다 일상과 멀찌감치 떨어져 보는 기분이 듭니다. 다리 위에 장난감처럼 줄을 선 차들이나 팔 다리를 겨우 알아 볼 정도로 사람들이 작게 보이면 우린 그래도 다 비슷하게 사는구나 싶어요. 지나오면 별 것 아니었는데 그 땐 왜 그렇게 힘들었나 싶다가도, 그 비슷한 일로 여전히 괴로워하는 모습에 놀라기도 합니다.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고 다시 사랑도 하고 비슷한 차림으로 비슷한 길로, 그냥 그렇게 계속 돌고 있는 것 같아요. 대단할 것 하나 없는 그 모습들이 허무하기도 하고 그래서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 가사 중 '밤이 깊어질 수록 더 눈 부신 이 도시에 너는 나를 나는 너를 따라 하며 사는데'는 서효인의 시집 [여수]에 수록된 시 양화진의 구절 '서로를 따라 하면서 산다'와 '어두워질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도시 뿐'에서 원작자의 동의 하에 차용하였습니다.
6. Esmeralda
자석의 양극처럼, 직소 퍼즐처럼 단순히 정반대인 것이 되려 정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이 외면이 아니라 애정이라면 그만큼 멋진 일도 없을 것 같아요. 해답은 사람이라는 믿음이자 조금 더 받아 들이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