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뱀장어의 보컬 황인경이 들려주는 열두 가지 이야기 ‘12 stories, 12 concerts’
#12 타고난 길치
1. 북악스카이웨이
지금은 없습니다만, 잠시나마 자동차를 가지고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2015년 초 어느 겨울밤, 비록 100만 원짜리 중고차지만 야심 차게 거리로 몰고 나왔습니다. 자가용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는 바로 그 ‘야간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서였죠. 좀 클리셰스럽긴 하지만 첫 야간 드라이브는 역시 전망대로 정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전망대를 찾아보고 북악스카이웨이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혼자 하는 야간 드라이브라니, 어쩐지 멋진 것 같아서 구불거리는 산길을 오르며 얼마간 신도 나고 그랬습니다.
도착한 전망대는 조용하고 어두웠습니다. 매점은 문을 닫고 있었고 도시 야경을 보고 돌아가는 듯한 두세 명의 사람을 마주친 걸 제외하고는 혼자였습니다. 겨울이었으니 차에서 내릴 때부터 꽤나 추웠습니다. 흰 입김을 뱉으며 옷깃을 여미고 서울의 수많은 불빛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가로등과 아파트,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상점의 불빛들이 거리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도 늦은 밤인데, 정말 많았던 불빛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날만큼은 도시의 그 불빛들이 낯설어 보이더군요. 겨울바람에 불빛들이 차갑게 부서지고 있었고, 날카로운 조각빛은 어둠을 더 도드라지게 보이는 듯했습니다. 너무 많은 불빛들이 저마다 빛나며 각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쏟아내는 그 모습은 시끄럽달까, 현기증이 나는 풍경이었습니다.
십 분 정도나 머물렀을까요. 곧 시동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 남도학숙
대학에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던 해는 2005년입니다. 저의 첫 서울 여행은 지자체에서 후원하는 기숙사인 남도학숙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지하철 노선도를 들고 어찌어찌 대방역이라는 곳까지는 왔는데, 한참을 걸어도 기숙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역시나 타고난 길치인 데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었던 시절이라 방향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택시를 잡아탔는데, 이제 막 새내기 대학생인 저에게 택시를 타는 건 조금은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택시 기사님에게 '남도학숙'에 가달라고 말했더니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우회전을 두 번 하고는 금세 차를 세웠습니다. 아마 한 300m 정도 주행했을 겁니다. 정말 순식간에 다시 택시에서 내려 남도학숙의 입구를 바라보니 좀 허망하고 야속한 기분이 들어 한참 동안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길을 잃는 것으로 타고난 길치로서의 첫 번째 서울 생활을 멋지게 장식했고, 그 뒤로도 꾸준히 길을 잃고 있습니다.
3. 종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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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를 파들파들 돌아다니다
느즈막 골목길도 저물쯤에야
엉성히 붙어있는 부엌 아래서
또 기대하다가 기대하다가
누가 문을 여는 생각만 했었어
이스턴사이드킥, [다소 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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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해체했지만, 오랫동안 동료 밴드로 함께 활동했던 이스턴사이드킥의 가사를 되뇌다 보면 지난 대학 시절이 떠오릅니다.
시시한 이야기에 낄낄거리는 개강 파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떠나는 엠티, 지저분한 동아리방…. 사실 그것들이 싫으면서 왜 그렇게 쫓아다녔나 모릅니다.
늦은 오후를 파들파들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도 이윽고 밤이 되면 종암동 월세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싫었습니다. 문을 열면 한눈에 전체가 보이는 조그만 원룸, 널려있는 옷가지를 피해가며 밟아야 했던 눅눅한 바닥…. 사실 그런 것들이 싫었던 게 아닙니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그런 시간이 저는 부담스러웠습니다. 너무 우울한 얘기겠지만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문을 닫고 혼자 남았을 때 자기 자신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게 싫었습니다.
4. 길치의 여행
인간으로 사는 일이 이렇게나 마음 쓰이는 일이었던가요. 지금은 어느 언덕을 오르고 있나요. 그 너머에는? 그 다음에는?
저도 여러분도 어쨌든 계속 걸어 나가겠지만, 이번에 발표하는 노래를 끝으로 길치의 여행은 일단락입니다. 작년 9월 첫 싱글 [늙은 개의 여행]으로 시작했던 열두 개 이야기의 종착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순전히 우연이긴 합니다만(정말?) '긴 여행을 떠나기 딱 좋은 날이야'라며 시작했던 여정이 '아직도 여행자 같은 그런 기분야'로 끝나는 게 어쩐지 의미심장한 것 같기도 하고, 좀 재미있기도 합니다.
어차피 한평생이 여행이라면 휘파람이라도 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여행이 즐겁기를. 길을 잃는 게 두렵지 않기를.
2018년 가을
글_황인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