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뱀장어의 보컬 황인경이 들려주는 열두 가지 이야기 ‘12 stories, 12 concerts’
내 등 위로 쏟아지던 봄 #8 날씨 때문에
- 꿈꾸지 않은 십오 초
가장 완벽한 오후를 보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지난해 4월의 어느 볕 좋은 날, 친구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혼자 앉아 저는 새로운 노래를 하나 지었습니다. 조용한 제주의 마을, 볕을 가득 머금은 의자 위에서 봄은 제 등 위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꿈을 꾼 듯도 했습니다. 과거는 끈적거리게 관자놀이에 붙어있는 기분 같은 것이었고, 미래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의미의 꿈은 현기증 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지요.
(전략)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어제와 내일 양쪽에서 잡아당겨지며, 영원과 필멸의 꿈 사이에서 버둥거리며 살아갑니다. 저에게 가장 완벽했던 그 날의 오후는 살아온 계절과 살아갈 계절 사이에서 만나는 아주 짧은 시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십오 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평화로운 침묵 속에서 저는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가 되어 배경 속에 가만히 녹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 마음 마음 마음
그 많은 마음 마음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은 도무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요.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여행을 한다고 해도 자기 키만큼 큰 배낭을 메고 걷는다면 마냥 헛것일 수 있겠지요. 날씨 좋은 날 풀밭 위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가 되는 일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으로 사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노래를 만들 때, 가사를 지을 때도 온갖 마음이 저를 괴롭힙니다. 때로는 저의 입은 제가 아니기도 합니다. 입으로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귀까지 들어오는 그 짧은 거리를 지나오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묻어버리는지를 생각하면 아득한 기분이 듭니다.
- 흘러간 옛 노래
새로 발표하는 노래 ‘날씨 때문에’는 저에게 꿈꾸지 않은 십오 초 같은 곡이라서 자랑하고 싶습니다. 손을 뻗어 나무의 결을 확인하듯,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우연히 발견한 노래입니다. 편의상 가사도 붙이고 제목도 붙였지만 사실, 이 노래에는 아무런 이름도 없습니다.
무심코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가사는 넘겨짚으면서 흥얼흥얼 부르다가 옆에 앉은 사람에게 ‘근데 이 노래 제목이 뭐였지?’하고 물어보는 그런 식이지요. 부른다는 자각도 없이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옛 노래는 자기 바깥의 것이라기보다는 오롯이 자신의 것입니다.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노래가 마음에 새긴 흔적이라고나 할까요.
‘날씨 때문에’는 짓자마자 저에게 흘러간 노래가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세상에 내보일 이 노래가 누군가에게는 곧 흘러간 노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어제도 내일도 잊은 채 흥얼거리는 노래. 날씨가 좋은 날 따뜻한 햇볕이 등을 데우듯, 이 노래가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글_황인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