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뱀장어'의 보컬 '황인경'이 들려주는 열두 가지 이야기 12 stories, 12 concerts
#5 [273]
- 나의 스쿨버스, 273
273은 서울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 노선 번호입니다. 대학생의 스쿨버스 라는 별명이 있기도 한 노선이죠. 저의 주된 활동지인 홍대 인근도 이 버스가 지나가고 제가 다녔던 대학 앞에도 273이 서는 정류장이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데이트가 있을 때, 영화를 보러 갈 때 273을 타는 일이 많았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지내면서 가장 많이 탔던 버스라서 273은 곧 버스의 대명사 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홍대 부근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적지만, 대학 생활과 밴드 일을 병행하던 때에는 합주나 공연을 마치고 기타를 짊어진 채 273에 올라타는 일이 많았습니다. 운이 좋으면 앉아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우두커니 서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 무표정한 사람들
저 같은 경우, 버스를 타는 동안에는 조금은 편한 기분이 됩니다. 긴장을 늦추고 눈을 내리깔고 있어도 버스는 무리 없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일단 버스에 올라탄 이상 목적지까지 열심히 가는 방법은 없지요. 하루에 얼마 되지 않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랄까요.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지요. 잠시 뒤면 헤어질 낯선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온전히 혼자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버스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무표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무표정이 싫지 않아요.
- 인생의 회전목마
종점이 가까울수록 버스 안 사람은 줄어들고, 창문 밖에는 부드럽게 어둠이 깔립니다. 저에게 273의 창문은 창문이면서 스크린이기도 했습니다. 창문은 환한 동네를 보여주기도 하고, 비 내리는 어두운 골목길 입구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신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백석이 흰 바람벽에서 보았을 그런 얼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의 OST 중 한 곡인 ‘인생의 회전목마’를 특히 좋아하지요. 왈츠풍의 이 곡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버스 창가에 앉아 차가운 창문에 한쪽 이마를 기댄 채 이 곡을 듣는 것입니다. 제가 새롭게 발표하는 왈츠풍의 노래 ‘273’도 그런 순간을 기다리며 여러분의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황인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