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일상에 보내는 관조의 의지
슈게이징의 자장 안에 존재하지만 셔츠보이프랭크의 음악을 슈게이징 사운드라고 단정하긴 꽤 난감하다. 셔츠보이프랭크의 가사는 텅 빈 일상 속에 침잠하고 싶은 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슈게이징 정서와 연결되어 있지만, 사운드는 강렬한 파열음처럼 왜곡된 소음을 쏟아낸다. 마치 일상의 공허함을 벗어나고 싶다고 욕망하지만, 그러한 일탈조차 사치인 지독한 현실의 무게에 더 절망하는 상황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고나 할까? 비루하게 느껴지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 현실의 큰 벽 앞에 부딪히고만, 그래서 그 현실을 지독하리만치 끝까지 관조하겠다는 정서를 음악으로 구현한다. 공허하고 허망한 현실에 개입하지 않고 지켜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의지를 요하는 작업이다.
공간계 이펙터로 뿌연 울림을 자랑하던 기타 연주는 곧 자글대며 쏟아진다. 그렇다고 가청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폭발적이지도 않다. 현실을 도피하는 판타지로 빠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전형적인 구조의 노래를 만들지도 않았다. 현실을 비틀어 다른 그림을 그리지만 비현실적인 추상으로 나가 현실의 비루한 삶을 벗어나지도 못하는데, 그렇다고 현실을 아름답게 만들지도 않는 느낌이다. 트레몰로 주법으로 만드는 기타 연주는 선명하지 않지만, 연주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 왜곡하지 않는 특별한 소리의 경험을 준다. 거의 모든 곡의 클라이맥스에서 트레몰로 주법을 사용하는 밴드의 의도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뿌옇게, 그러나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겠다는 의지.
첫 곡 「LESELIE & ANNIE」은 강한 드러밍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나하나 정확하게 내리치는 드럼 연주에 대응하는 기타는 정반대로 흐릿하지만 날카롭게 긁어댄다. 하나의 결로 정리될 수 없는 현실 속 일상처럼 말이다. 침몰하는 죽음 앞에 무기력한 자신을 바라보지만 “난 너의 사랑보다 내 주린 배가 고파”라고 외치고 마는 「Frank」는 밴드가 이 음반을 통해 꺼내고픈 정서를 함축한다. 기타와 보컬 스타일에서 1970년대 하드록의 비장미마저 느낄 수 있는 「코펜하겐」에 담긴 조그맣게 자글대는 효과음과 읊조림은 「Frank」와 다른 결이지만 역시나 셔츠보이프랭크의 정서를 그대로 전한다.
그런 면에서 후반부에 등장하는 「곡예」나 「Where is my Benjo」를 처음 들으면 앨범 전반의 흐름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꽤나 선명한 구조를 가진 리프가 곡의 중심에서 정형성에 가까운 형태를 다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셔츠보이프랭크는 의도적으로 다른 악기의 힘을 빼거나 나선처럼 반복적인 보컬을 배치 하는 방식으로 정형성에 균열을 가한다. 그리고 덕분에 음반의 마지막에서 담담하게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포스트록 「너의 도시」를 자연스레 맞이하게 만든다.
불만족스런 현실에 맞짱 뜨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 싶지 않은 현대인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음악이랄까? 개별곡보다 앨범 속 노래가 하나씩 더해질수록 설득력이 커지는 냉소적이지만 뜨거운 음반을 만났다.
조일동 (음악취향Y 편집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