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 역사 속 선구적 천재 여성 싱어송라이터 故 장덕,
우리 곁을 떠난 후 30주년을 맞아 세대를 건넌 후배 뮤지션들이 재해석한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 시리즈 그 첫 번째, 레인보우 노트의 [님 떠난 후]
1990년 2월 4일, 장덕이 향년 28세로 생을 접게 되었다는 소식은 가요계 전체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녀의 요절은 단순히 그녀의 유가족과 팬들만의 슬픔으로 끝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그 순간 한 명의 훌륭한 재능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자 엔터테이너를 잃은 셈이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동료 선후배 가수들은 그녀의 부고 소식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고, 당시 한국의 음악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당시 그녀 사망 4개월만에 이선희, 전영록, 최성수, 김범룡 등 많은 동료 아티스트들과 연예인들이 참여한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되었는데, 이 앨범은 음악 팬은 물론 동료 연예인 및 관계자에게도 환영을 받아 음반 판매와 방송 횟수로 집계하는 뮤직박스 차트와 KBS 「가요톱10」에 최상위로 랭크되기도 할 만큼 당시 그녀에 대한 대중의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Herstory of 장덕: 1961~1990
돌아보면 그녀에게 붙었던 당대의 수식어 중 하나가 바로 ‘천재 여성 싱어송라이터’였다. 그것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대중 앞에서 선보였기 때문이다. 1961년 4월 21일생으로 예술가 부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힘겨운 유년기를 거쳐야만 했다. 오빠 장현에게 배운 기타로 외로움을 달래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스스로 곡을 쓸 역량을 갖췄고, 사춘기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 카펜터스(The Carpenters)가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것에 착안해 장현-장덕 남매를 듀엣으로 미8군 무대에 출연하게 했다. 이것이 듀엣 ‘현이와 덕이’의 출발이었고, 이어서 한국 방송 무대에서도 그들의 실력이 화제를 모으면서 남매는 70년대 청춘 영화의 단골 인기 배우로 픽업되며 본격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장덕의 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이 빛이 나게 된 시점은 자신이 중학교 2학년 때 습작해 놓은[소녀와 가로등]을 제1회 MBC 서울가요제에 출전한 가수 진미령이 노래하면서였다. 작곡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 했던 규정상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지휘대에 선 그녀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그녀는 현이와 덕이의 음반들 외에도 계속 타 가수들에게 곡을 제공하면서 성년도 되기 전에 음악적 천재성을 본격적으로 펼쳐갔다.
그러나 불우한 가정사에서 비롯된 우울증은 계속 그녀를 괴롭혔고, 결국 1980년 엄마를 만나고 작곡자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학기간 동안 그녀는 현지에서도 연예활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짧은 연애와 결혼 생활을 거쳤으며, 내쉬빌 작곡가 협회에도 등록해 현지 컨트리 가수에게도 곡을 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다시 한국의 가족과 연예 활동이 그리워진 그녀는 1983년 귀국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컴백곡 [날 찾지 말아요]로 가요계에 다시 얼굴을 알렸다.
1985년 오빠 장현과 다시 현이와 덕이로서 듀오 앨범을 내면서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를 히트시킨 장덕은 이은하의 명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1986)이 수록된 앨범의 대부분을 작곡하면서 더욱 성숙한 싱어송라이터로의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님 떠난 후/이팔 청춘의 고백](1986)에서 [님 떠난 후]가 각종 가요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대중적 스타덤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이후 [이별인줄 알았어요](1987), [얘얘](1988) 등의 준수한 히트곡들이 이어졌지만, 그녀의 생전 마지막 앨범이 된 [예정된 시간을 위해](1989)를 진행하던 시점에 오빠 장현이 설암 투병을 하게 되면서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해 가면서 쌓여왔던 그녀의 우울증은 다시 커져갔다. 결국 앞서 언급한 대로 1990년 2월 4일 일 오전 2시 경, 그녀의 자취방에서 우울증과 불면증 때문에 먹었던 세 가지 약을 동시에 먹은 여파로 인한 상승 작용이 가져온 쇼크로 인해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위에서 언급한 추모 음반 발매 2개월 후, 오빠 장현 역시 병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덕의 최고 히트곡이자 80년대 한국식 '뉴웨이브 팝'의 대표 트랙 [님 떠난 후],
그녀가 떠난 후 30주년을 맞아 시티 팝 듀오 레인보우 노트를 통해 세련되게 재탄생되다
오는 2021년 2월, 그녀의 사망 30주년을 추모하게 되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후배 뮤지션들이 그녀의 대표곡들을 커버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로 그녀의 천재적 음악 감성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첫 번째로 선택된 곡은 바로 그녀의 대표곡 [님 떠난 후]다.
이 곡이 담겼던 앨범 [님 떠난 후/이팔 청춘의 고백](1986)은 그녀의 커리어에서도 꽤 과감한 결과물이었다. 나미의 대표적 히트곡 [빙글빙글](1984)을 통해 1980년대식 신스 팝/뉴 웨이브에 한국적 멜로디를 담은 댄스 팝의 새 물결을 이끌었던 김명곤이 전곡의 편곡을 맡았고, 몇몇 업템포의 곡들에선 당시 서구 뉴 웨이브나 1980년대 미국 주류 R&B 시장의 신스 훵크(Synth-Funk)트랙들(이 장르의 사운드는 1980년대 JPOP씬과 비교하자면 현재 '시티 팝'으로 분류되는 음악들과도 일맥 상통한다)에서 들을 법한 펑키하고 세련된 베이스 그루브가 넘실거렸던 음반이었다. 그 앨범의 매력의 총체가 집약된 곡이 바로 앨범의 타이틀 곡 [님 떠난 후]였다. 튀지 않는 미디움 템포의 펑키함이 곡의 그루브를 탄탄히 끌고 가는 가운데 후렴에서의 그녀의 보컬과 가사의 임팩트가 완벽한 클라이맥스를 조성하는 트랙이었다. 아직도 원곡을 청취해보지 않은 젊은 세대라면 반드시 원곡을 먼저 청취해보기를 권한다.
이제 이 곡을 2020년대의 젊은 감성에 부합하게 커버할 그룹은 바로 2019년 [1호선]으로 데뷔한 후 [샛별], [광안리], [소행성] 등 지금까지 꾸준히 '시티 팝 리바이벌'의 지향점을 갖고 꾸준히 좋은 작품들을 이어가고 있는 여성 듀오 레인보우 노트다. 일단 인트로 연주를 듣는 순간부터 이 곡에서 두 사람이 원작자와 원곡에 대한 이해를 충실히 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룹이 지향하는 시티 팝 분위기를 가득 품은 이사라의 신시사이저 연주와 리듬 편곡이 원곡보다 세련되게 들리지만, 역시 이 사운드도 '1980년대'라는 감성과 애초에 맞닿아 있기에 두 아티스트간의 정서적 교감이 자연스레 시대를 이어가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 보컬 안슬희의 가창은 원곡의 가사와 가창이 전했던 슬픔의 감정 표현을 잘 계승하면서도 보다 현 시대의 청춘들의 감성에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방향으로 완성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장덕은 분명히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훌륭한 뮤지션이다. 어린 나이부터 감정과 멜로디를 노래에 잘 담아내는 천재성으로 주목받았지만, 현이와 덕이, 솔로로서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숨을 거둘 때까지 (다양한 활동 속에서도) 언제나 뮤지션의 본분에 충실하면서 최신의 트렌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음악에 녹여낸 싱어송라이터의 모범을 보여준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제 레인보우 노트의 노래와 연주로 다시 생명력을 얻은 [님 떠난 후]를 통해 음악으로 음악인 '장덕'의 매력이 세대를 이은 큰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김성환(Music Journalist, [Locomotion] Edito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