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침내 하루를 더 살게 된다 - '수젠' [Underwater] / 차우진 (음악평론가)
어째서인지 아득한 소리를 좋아한다. 이 소리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음악 이전의 소리라는 전제로, 그로부터 받은 인상을 기존의 질감이나 물성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젠이 만드는 소리는 물컹하고 부드럽다. 그로부터 혼란스럽고도 안락한 감각이 따라온다. 목욕탕이든 풀장이든, 몸을 웅크린 채 잠수할 때의 감각에 가깝다. 아주 얇은 막 하나로 나는 세계와 단절된다. 이때의 단절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적당히, 혹은 아슬아슬하게 분리된 감각이다.
앨범 제목은 [Underwater]다. 물 밑과 위를 구분하는 것을 수면이라고 부를 때, 정작 '수면'이란 물과 공기가 접촉하는 면, 두 개의 상이한 세계가 나눠지는 경계일 것이다. 이것은 관점에 따라 안정적이기도 하고 불안정하기도 한 상태다. 찰랑거리는 수면은 평화롭게 보이지만, 실상 그런 상태란 양 쪽의 세계가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관계, 물과 공기가 서로를 강하게, 최대한의 힘으로 밀어붙인 결과이기도 하다. 이 찰랑거리는 안정감은 의외의 전력투구로 형성된 균형일지 모른다.
수젠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평화롭게도, 팽팽하게도 들린다.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른바 '언더'의 감각이 유유하면서도 격렬하게 흐른다. 이 소리에는 가벼운 우울과 적당한 안정이 공존한다. 방금 나는 그 둘의 감각이 '뒤섞여 있다'고 쓰려다가 '공존한다'고 고쳐 썼다. 혼란스럽게 섞였다기보다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그러니까 조율된 감각이다. 음악이란 사실 특정한 목적에 의해 관리된 소리다. 리듬, 멜로디, 하모니라는 틀 안에서 관리되는 이 소리(들)은 물 밑에 있는, 직접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감각을 온 힘을 다해 설명한다.
나는 현대인들에게 가벼운 우울은 반드시 필요하거나, 혹은 매우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매일같이 여기저기서 받는 상처들, 어떤 실망과 슬픔, 혹은 좌절과 상실, 상처인 줄도 모르고 받은 상처들을 지워내고 극복하고 납득하는데 필요한 과정. 당신이 유달리 예민하든 예민하지 않든 상관없다. 인간은 대체로 악의와 선의를 다가진, 모순적이고 그렇기에 쉽게 설명되지 않는 존재니까. 대체로 교묘하게 스스로를 피해와 가해의 애매한 교차선 어디쯤에 놓아두는 존재니까.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약간의 틈이 중요할 뿐이다. 뭐라고 특정할 수 없는, 이곳과 저곳 사이의 틈.
내게 '언더'는 바로 그런 감각이다. 보이진 않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것. 그러나 정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논리와 이성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 생략과 비약이 지배하는 세계. 이 음악은 바로 그 세계를 향해, 웅크린 채 물 속에 가라앉아 물컹하고 부드러운 압력에 몸을 맡기고 웅웅대는 소리 안에 스스로를 가둔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일. 그렇게 기꺼이 꽉, 자신을 움켜잡는 일이다. 그 순간 미소 같은 것이 살짝 떠오를 수도 있겠다. 수젠의 음악은 바로 이런 찰나의 감각을 건드린다. 거기에는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를 좌절과 죄책감이, 또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공존한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침내 하루를 더 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앨범을 '안락하면서도 의기소침한 주말 아침 같은 음악'이라고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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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에 홀로 던져진 듯한 외로움, 그 침체된 감정에 빠진 제 모습을 'underwater'로 표현했습니다. 우울한 감정 안에서 나밖에 모르는 아픔을 표현하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함으로써 오히려 위로와 편안함을 느끼는 모순적인 감정을 담고 싶었습니다. "
- 수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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