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터널의 끝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끝을 알지 못한 채 어렴풋 밝은 미래를 그려나가던 우리들의 이야기.
한 해의 끝은 충만함을 주기도 하지만 한 뼘 뒤집어보면 흘러가 사라져버린 것들의 빈자리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장식을 털어낸 뒤 앙상한 가지만 남은 트리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는 끝과 시작이 마주하고 있는 곳에서 잘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해 행복하고도 불안한 기대를 건다. 터널을 앞에 두고 부풀었던 마음은 그 속으로 들어가며 이쪽,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 과도기적인 상태에서 고독한 회상으로 익어간다.
그곳에서 오래전의 낯빛을 떠올리며 걸음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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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싱글 [Happyhappyhappylife]와 첫 EP 앨범 [문없는집]으로 그들만의 몽환적이면서도 리드미컬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던 밴드 문없는집이 약 1년 반의 긴 공백기를 거쳐 더욱 넓어진 스펙트럼을 갖고 돌아왔다. 마치 한 편의 옴니버스 영화, 혹은 5막의 연극을 보는 것과도 같은 이번 EP 앨범 [밝은 미래]는 과도기에 놓여있는 존재들의 양가적인 기대, 그리고 상실의 정서들에 대해 노래한다.
‘더 높은 길로 끌어줄래?’
싱글로 선공개되기도 했던 첫 곡 ‘터널’은 루핑하듯 이어지는 일렉 피아노 위에 베이스와 드럼, 기타가 차례로 레이어들처럼 쌓여가며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 나가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싱글 버전과는 달리 잠에서 덜 깬 듯한 나른한 보컬과 차분한 편곡이 돋보이는 한편, 후렴을 지나서도 여전히 끊길 듯 끊기지 않는 기타의 반복, 작은 언덕을 오르내리는 듯한 곡의 구조는 시작과 동일하게 열린 채 끝을 맺으며 자연스레 다음 언덕이 있음을 암시한다. 노이즈의 틈입으로 고장난, 혹은 버려진 듯한 질감을 선사하는 두 번째 트랙 ‘밝은 미래’는 앞의 ‘터널’과 함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담아낸다. 일기 혹은 시를 쓰듯 덤덤한 가사와 달리, 이전까지는 그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사운드와 소스들이 귀를 촉각적으로 자극하듯 파고들어 온다. 세 박자에 맞추어 고장난 기계를 반복적으로 돌려나가는 듯한 음악적 연출은 ‘희미하고 밝은 미래’를 앞에 두고 미로에 갇힌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다.
이번 앨범에서 문없는집의 편곡적 실험은 세 번째 트랙인 ‘저묾’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형적이지 않은 이 곡의 구조는, 터널의 보다 깊은 곳에 홀로 고립되어 제자리를 맴도는 듯한 도입부를 거쳐, 흡입력 있는 보컬과 코러스 톤의 기타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지며 후렴으로 이어진다. 이후 색소폰, 기타로 긴 연주가 계속되며 기억을 촉발하는, 혹은 방해하는 어지러운 소리들이 난입하여 곡의 흐름과 합을 맞춘다. 마치 여러 겹의 액자를 파고들었다가, 다시 노래로 되돌아 나오는 듯한 곡의 구성은 누군가의 삶을 스크린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 영화적 애수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 곡 ‘시간이 흐르지 않는 친구에게’에서 상실의 정서로 이어진다. 이번 앨범에서 어쩌면 가장 대중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곡은, 피아노 기반의 옛 록발라드 형식과 오페라에 쓰일 법한 하강하는 보컬 멜로디를 함께 엮어내어 한편으로 독특함을 더했다. 때문에 이 곡은 선명한 멜로디와 함께 안정적으로, 하지만 하강하는 보컬에 의해 단절적으로 전개된다. 세상에 더 이상 없는 이를 향한 노랫말 속에는 다정한 약속과 상실의 슬픔이 공존한다. 그렇지만 마지막 트랙 ‘Exit’에서는 터널의 끝, 혹은 새로운 시작을 찾고자 하는 엷은 빛이 엿보인다. 묵직한 베이스 위로 꿈결처럼 펼쳐지는 후렴의 코러스와 가사는 이제껏 참아왔던 숨을 터주는 듯 조금은 희망적이다. 차갑게 처리된 사운드들은 이 엷은 희망과 배치되며 ‘시간이 흐르지 않는 친구에게’에서 외쳤던 ’봄의 양날’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킨다.
끝은 마주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는 한, 완전한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난하게 보낸 올해뿐만이 아니더라도, 이 터널은 우리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언덕에 오르기 전, 두려움과 기대라는 양가적인 감정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기에 끝을 모르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게 기억되는 게 아닐까. 엷은 희망 속으로 걸음을 향한 문없는집의 다음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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